뽕나무 가지가 싱싱한 뽕잎을 달고, 명주실을 뽑아내는 누에의 꿈을 키운다. 아침 이슬 머금은 뽕잎은 남다른 의지와 보람을 품은 듯 뜨거운 여름 태양에도 거침이 없는 푸르름이다. 내 어린 시절은 농촌에서 벼농사 보리농사를 제외하고는 양잠(養蠶)이 주요 한 농촌일 중의 하나였다. 더구나 양잠만큼 목돈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없어 집집마다 누에를 키워 자녀들의 등록금을 내기도 하고, 집안의 애경사(哀慶事)에 사용하기도 했다. 누에를 키우기 위하여 가장 필요한 것은 뽕나무이다. 그래서 밭둑마다 냇가의 언덕마다 눈에 띄는 것은 뽕나무였다. 뽕나무는 이름조차도 우리의 고향같이 포근한 이름이요 느낌이 순박(淳朴)하여 정감이 가는 나무이다. 가지들의 뻗어남이 얼마나 너그럽게 늘어져 있는지 마치 아버지의 어깨 같은 편안한 나무였다. 낮은 곳으로 풍성히 뻗어 있는 나뭇가지들은 어린 우리들이 올라가 마음놓고 뽕을 따고 오디를 따먹을 수 있는 마음좋은 친구였다. 어쩌면 뽕나무와 우리의 어린 시절은 뗄 내야 뗄 수 없는 추억이 깃든 나무이다.

뽕나무에는 중요한 결실이 두 가지 더 있다. 유월 경에 연둣빛으로 시작하여 빨간빛으로 익어 가는 오디가 그 중 하나이다. 우리는 벌써 오디가 빨간색에서 자주 빛으로 변해갈 무렵이면 오디를 따먹기 시작하였다. 설익은 신맛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이것저것 골라서 많이도 따먹었다. 오디가 진한 자주 빛으로 익어갈 때면 우리들의 입술은 파랗게 물이 들도록 오디를 따먹고 때로는 배앓이를 했던 기억도 새롭다.

두 번째는 뽕나무 버섯이다. 집 뒤안에 또는 밭둑이며 언덕에 다정한 친구처럼 서 있던 뽕나무들도 세월의 흐름은 어쩔 수 없나보다. 가지마다 죽은 가지가 생기고 뽕잎은 윤기를 잃어가며 고목이 되어간다. 고목에서 나는 뽕잎은 실하지 않아 그 나무를 베고 다시 나무를 심는다. 그렇게 잘린 뽕나무 그루터기는 비를 맞고 햇빛을 소화하기도 하면서 남은 세월을 산다. 뽕나무는 잘리어서 까지도 우리에게 베풀기를 마다하지 않는 고마운 나무이다. 잘린 나무는 부엌에서 밥을 짓는 땔감으로도 쓰이고, 우리를 추위에서 편안하게 쉬게 하려고 구들을 덥혀 주는 군불 감이 되어 마지막 재가 될 때까지 몸을 사른다. 또한 잘리고 남은 그루터기에서는 언제부터인가 작은 모자를 쓰고 고개를 살며시 내미는 듯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뽕나무는 그루터기에서 마지막 베풂으로 버섯을 우리에게 준다. 뽕나무 버섯의 부드러우면서도 졸깃졸깃한 맛은 일품이다.

나에게는 남동생이 하나있다. 나하고는 세 살 터울이니 벌써 사십 중반이 된 동생이다. 동생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면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물고기도 잘 잡아 큰형들도 감탄하곤 했다. 뿐만 아니라 이 동생은 무엇을 잘 찾는 숨은 능력이 있었던 것 같다. 이 동생이 밖에서 들어올 때 가끔 손에 들고 들어와 우리 집 밥상에 오르는 것이 있었다. 바로 오늘 내가 이야기 하고자하는 버섯이다. 때로는 닥나무 버섯도 따 가지고 와서 어머니와 누나의 칭찬을 받곤 하였다. 그 시절 시골밥상에 가장 많이 오르던 것은 된장찌개와 청국장이었다. 우리 집 안방 그것도 가장 따뜻한 아랫목에 묻어두면 온 집안이 청국장 뜨는 냄새가 진동을 한다. 며칠을 스스로 곰삭아지면 맛있는 청국장이 되는 것이다. 사람도 제대로 사람 맛이 들려면 역경 속에서 스스로를 삭힐 줄 알고 겸손히 순응할 줄 알아야한다. 청국장 그 구수한 맛, 그 중에서도 우리 어머니 끓여주시는 청국장 맛은 최고였다. 거기에 동생이 따온 뽕나무 버섯과 얇게 썬 무가 들어가면 그 맛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온 식구가 밥상에 둘러앉아 가운데에 있는 뚝배기에서 떠먹던 청국장 맛은 잊을 수가 없다. 운이 좋아 버섯이라도 한 조각 건져 올리게 되면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그 맛이 지금도 그립다. 우리 집 일곱 식구가 한 상에서 먹던 청국장은 굉장한 맛이었다. 먹을 것이 많지 않던 가난한 시절이라 무엇이나 맛있을 시절이었지만 어머니의 손맛이 배어있는 그 맛은 혀로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이었다. 깊이 없는 맛에 길들여지는 시대에 살면서도 그 시절 그 맛을 생각하면 기쁨과 감동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가을 하늘이 마음을 기쁘게 해주는 파란 날이다. 엊그제 내린 비로 먼 산이 가까이 보이는 맑은 날, 덕수궁 돌담길에 서있는 나이 어린 느티나무의 수줍은 듯 물든 붉은 모습이 곱다. 은행나무의 노란빛의 단풍은 젊음이 원숙한 모습으로 변하는 중년신사의 중후한 기품을 보는 듯 하여 흐뭇하다. 오늘 같은 날이면 아무 일 없이도 웃고 다닐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좋은 날이다.
기쁨은 몰려오는 것이라 했던가. 어제는, 이 좋은 가을에 정성이 듬뿍 담긴 선물을 받았다. 어제저녁 늦은 시간에 귀가하여 탁자 위에 펼쳐져 있는 표고버섯을 보았다. 서산 태안에 사시는 김미라 詩人이 보내 온 것이다. 집에서 재배한 표고버섯을 수확하여 우리 집에 보내온 것이다. 하나하나 모습을 보노라니 수줍은 듯 고개 숙인 모습이 詩人을 닮아 보이기도 하고, 두툼하고 균형 잡힌 모습들이 가장 좋은 것들을 골라 보냈음을 느낄 수 있다. 그 정성이 손끝을 통해 가슴까지 스며온다. 아침에 아내에게 이 버섯을 넣고 청국장을 끓여 먹으면 좋겠다고 하니, 아내는 버섯볶음 요리를 해도 맛있겠다고 한다. 아마도 아내는 내가 먹고 싶은 청국장의 그 진한 추억의 맛을 이해하지 못하나보다. 가까이 사는 누님 댁에 나누어 드릴 것을 이야기하며, 좋아하실 누님의 얼굴 생각에 마냥 행복하다. 어머님께도 버섯을 넣고 청국장을 끓여 드시게 하고싶다. 그 옛날 어머님께서 우리에게 끓여 주시던 청국장, 그 맛을 느끼시게 해드리고 싶다. 버섯을 잘 따와 귀염받던 동생과도 나눠먹고 싶다. 정성을 나누어 그 따뜻함을 전하고 싶다. 어린 시절 그 추억의 맛을 함께 느끼며 고향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비록 가난했지만 오순도순 행복했던 그 시절이 그리웁다. 행복은 물질에 있지 않다는 것을 새삼 느껴보며 마음속에 그리는 그리운 얼굴들 , 한 가지 추억으로 행복한 내 형제들 생각에 가슴이 뭉클하다. 너무도 소중하여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눈시울이 붉어진다.

때를 따라 자신의 땀과 정성을 나누어 줄줄 아는 따뜻한 마음이 이 하늘아래, 그것도 내 곁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되고 기쁨이 되는지. 오늘은 일찍 퇴근하여 구수한 청국장 맛을 보고싶다. 김이 몽글몽글 나는 청국장 그릇에 깊숙이 수저를 집어넣어 정성이 묻어 있는 표고버섯을 건져 올려야겠다. 보내주신 정성과 그 어려움 속에 느꼈던 행복한 날들의 생각하며 그 맛을 음미하고 싶다. 결코 눈물을 흘리지 않으리라. 비록 눈시울이 붉어질지라도....

/한강교회 장로,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