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바르게 살자' 포스터

(전략) 아무래도 나는 비켜 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 서 있다. /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을 조금쯤 /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 이발쟁이에게 /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 야경꾼에게 이십 원 때문에 십 원 때문에 일 원 때문에 / 우습지 않으냐 일 원 때문에 //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 정말 얼마큼 적으냐…….

-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몇 달 전 일입니다. 8살 된 아들이 태권도를 배우러 갈 때 아파트단지 안으로 들어오는 태권도장 승합차를 탑니다. 같은 곳에서 같은 시간에 타는 아이들이 대부분 또래거나 7살 동생들이었고 딱 한 명이 9살 남자아이였습니다. 대부분 남자 아이들이라 태권도 차가 오기 전 아파트 주차장을 뛰어 다니며 놀았는데 차를 운전하던 관장이 이를 보고 좀 위험하다 싶었는지 차가 오기 전에는 절대 차도로 내려오지 말라고 하면서 그 중에서 제일 큰 2학년 형에게 동생들을 잘 돌보라고 지시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같은 단지에 사시는 친정어머니께서 우연히 그 9살짜리 형이 동생들을 인도에 한 줄로 세우고 차렷 자세로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을 보신 것입니다. 우리 아들을 비롯한 다른 동생들은 그런 형을 별로 무서워하지도 않고 장난을 치기도 하는데 그 형은 그럴 때마다 마치 자기가 태권도 사범이라도 된 것처럼 아이들을 호령하더랍니다. 친정어머니는 그런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그 아이에게는 그런 식으로 동생들을 대하지 말라고 꾸중을 하시고 차가 오자 관장에게도 뭐라고 하신 모양입니다. 그 후로는 그 형이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저는 이 아이들의 모습에서 우리의 죄성이 얼마나 무섭고 질긴가에 대해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권력’으로 휘두르려는 모습 말입니다.

권력의 사전적 의미는 ‘남을 복종시키거나 지배할 수 있는 공인된 권리와 힘’입니다. 일반적으로는 ‘국가나 정부가 국민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강제력’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미셸 푸코는 “현대사회의 권력은 국가가 갖고 있다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곳곳에서 이미 자리 잡고 있다.”면서 이러한 권력의 이름을 ‘미시권력’이라고 했습니다. 푸코는 가정, 법원, 공장, 실험실, 대학, 성관계 등등의 공간 속에서 ‘국가권력’이 아닌 ‘미시권력’이 작동하고 있음을 실증적으로 제시합니다. 가정에서는 가부장적인 가장, 법원에서는 재판관, 공장에서는 감독관, 실험실에서는 교수, 학교에서는 교사나 선배 등등...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권력의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싶어 하지만, 실은 자신도 모르게 권력을 휘두르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9살밖에 안 된 어린 아이에게도 그 ‘권력’을 휘두르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관장이 그 형에게 맡긴 역할 ‘동생들이 주차장에서 놀다가 다치지 않게 돌보는 것’이었고 그 역할은 다양하게 시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도 위에서만 놀게 한다든가 주차장에서 뛰어 놀게 하다가 차가 들어올 때만 주의를 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형은 동생들에게 명령하고 자기 말에 복종하게 만드는 방법을 택한 것입니다. 또 하나 놀라웠던 것은 제 아들을 비롯한 여러 명의 아이들이 그 형이 ‘관장’의 지시를 받았고 (물론 관장은 그냥 동생들을 돌보라는 의도였지만) 또 나이가 한 살 많다는 이유 때문에 그 형이 휘두르는 횡포를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인정하고 받아들였다는 사실입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겨 일부러 장난도 치지만 어느 한 명도 그 형에게 적극적으로 대항하지는 않은 것입니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단순하게 그 9살 형의 성격이 좀 과격한 이유 때문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어떤 책에서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읽게 되었습니다. 프랜시스 무어 라페의 ‘살아있는 민주주의’라는 책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라페는 때로는 그렇게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은 특별히 권력욕이 심하거나 성격이 모가 나있는 등 좀 특별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을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감옥실험’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필립 짐바도는 1971년, 스탠포드 대학에서 그 유명한 ‘감옥 실험’을 합니다. 짐바도는 평범한 젊은이들을 아무 기준 없이 제비를 뽑아 죄수와 간수로 나누어 모의 감옥실험에 투입하였고 죄수 역할자는 죄수 옷을 입고 감옥 안에, 간수 역할자는 간수 옷을 입고 감옥 밖에서 지내게 했습니다. 이 실험은 원래 2주 계획이었는데 짐바도에 의해 6일째 되던 날 갑자기 중단됩니다. 간수 역할자들이 죄수 역할자들을 학대하기 시작하였고 죄수역할자들의 심각한 신경쇠약을 초래하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간수 역할자들은 “내 손에 맡겨진 젊은이들의 필요보다는 ‘내 감옥’의 안전을 더 생각”하는 간수처럼 행동하게 된 것입니다.

이 실험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아무리 평범한 사람이라도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존재와 역할을 적극적으로 인식하지 않으면 이처럼 무섭게 변해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이 ‘이건 단지 실험일 뿐, 간수 역할자와 죄수 역할자는 전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적극적으로 꾸준히 했다면, 그리고 서로 그런 말을 계속해서 주고받았다면 이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죠. 그러나 간수 역할자들은 자신의 역할을 ‘권력’으로 인식했고, 죄수역할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것을 인정해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많은 죄의 모습 중 하나가 이렇게 어떤 ‘역할’을 ‘권력’으로 잘못 받아들이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역할’로 타인을 섬기려는 마음보다는 ‘권력’을 휘두르면서 타인보다 더 나은 우월감을 즐기려는 교만함의 다른 모습이니까요. 우리의 욕망이 시키는 대로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이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앞서 말한 ‘살아있는 민주주의’에서 라페는 “2차 세계대전의 ‘홀로코스트’는 어떤 정신 나간 나치들만의 행동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사악함의 결과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 충격적입니다.

아무 의지 없이,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되는 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를 죄의 모양으로 그냥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늘 깨어 있고 늘 정신을 가다듬어야 하는 이유는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리 주변에 항상 어슬렁거리며 우리의 연약함을 파고 들려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들 사이에서도 맡겨진 역할을 권력으로 생각하고 휘두르게 하고, 또 그것을 당하는 입장에서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른 채 그냥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그 연약함의 틈을 노리는 마귀의 술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김수영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의 화자의 태도를 잘 봅시다. 그는 스스로 자신을 ‘비겁하다, 옹졸하다, 우습다’라고 평가합니다. 얼마나 스스로가 옹졸하게 보였는지 모래, 바람, 먼지, 풀 같은 진짜 존재 의미가 작은 것들에게 ‘나는 얼마큼 적으냐’라고 반복해서 말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자신을 비하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시의 내용을 보니 상대적으로 힘이 있어 보이는 땅주인이나 구청직원이나 동회직원에게는 못하고 힘없는 이발쟁이나 야경꾼에게 화를 냈다고 합니다. 고작 일 원 때문에 말이죠. 우리는 어떻습니까? 강자 앞에서는 약하고 약자 앞에서는 강한 그런 사람을 우리는 욕하고 손가락질하지만, 자기 스스로가 그렇다는 것을 인식하고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혹은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겠죠. 그렇기 때문에 김수영의 이러한 자책은 오히려 아무 생각 없이 살아온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그 ‘부끄러움’은 약자 앞에서만 큰 소리 치는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발견했기 때문이며 또 그것이 우스울만한 일이라는 점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감정입니다.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약자이고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약자 앞에서만 큰 소리 내는 옹졸한 우리 모습입니까? 나 자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추종을 버리고 나의 현재 모습을 제대로 파악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늘 실수하는 우리의 모습이 완벽해질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모습을 스스로 ‘부끄럽다’고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리기만 해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실 겁니다. 그런 자세로 우리에게 맡겨진 역할을 ‘권력’으로 인식하지 않고 소명이라 여기며 행해야 합니다. 학교에서 교사들도 학생들을 대할 때 가르치는 역할을 권력이라 생각해서 학생들에게 힘을 휘두르게 되면 그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지식이 있는 자들이 지식이 없는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도 문제입니다. 부모가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교육 열풍도 겉으로는 자녀를 위한다는 명목이지만 결국 자녀를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만들고 싶은 부모의 횡포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는 친구 관계에서도 이러한 권력 구조가 보입니다. 외모가 뛰어난 친구, 운동을 잘 하는 친구, 집이 넉넉한 친구 등등. 또 교회 안에서는 어떻습니까? 중고등부 회장 출신이나 찬양팀 출신들, 혹은 그 교회를 오래 다닌 친구들을 중심으로 권력이 분배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통해 볼 때 우리가 깊이 느끼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 삶에서 섬기고 낮아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 알 것입니다. 우리가 생활하는 가운데 크고 작게 주어지는 역할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일 수도 있지만 그것을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는 ‘권력’으로 인식한다면 그 때부터는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죄의 모습으로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삶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살아가지 않으면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죄성은 금세 그 안일함을 틈타 겉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피조물입니다. 힘, 외모, 피부색, 인종이나 민족, 돈, 나이, 선후배 관계, 인기 등등 이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단지 해야 할 역할이 다를 뿐이죠. 예수님이 마굿간에서 태어나 십자가 형을 받으셨을 때는 그 모든 권세와 영광을 내려놓으셨고 그것이 구원의 길임을 입으로는 믿는다 믿는다 하면서도 생활 안에서 실천하기는 아직도 멀고 먼 일인가 봅니다.

* CCM비평월간지 'ccmer' 2008년 12월호

/ 고교 교사, 삼일교회 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