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이 높은 구두를 하이힐이라고 부른다. 4~8cm 정도 된다. 그런데 요즘엔 10에서 최고 15cm까지 되는 굽이 달린 구두가 인기이다. 이 구두의 이름은 ‘킬 힐’이다. 여기서 ‘킬’이 누구를 죽이다 할 때 ‘KILL'일까. 그런 셈이다. 호신용 도구로 써도 될 만큼 뾰족한 굽이다. 이래서 '살인적인 하이힐'이라는 뜻으로 이런 이름이 붙었다는 설(說)이 있다. 오늘은 이 ‘킬 힐’ 열풍에 대해 문화적인 관점에서 짚어보겠다.

킬 힐만으로 매력이 발산될까. 그럴 리 있겠나. 어제 황사와 돼지고기의 궁합을 이야기했는데, 킬 힐에도 궁합이 맞는 패션이 있다. 꾸준히 인기를 과시하고 있는 스키니 진 있지? 요즘 소녀시대가 입고 나오는 몸매 라인이 드러나는 꽉 낀 바지 말이다. 이 스키니진과 어울린다. 어울리는 것, 또 하나 더 있다. 역시 몸매 라인이 드러나는, 체조복 같은 검은 또는 회색 계열의 스타킹인, 레깅스이다. 레깅스와 킬 힐이 한데 어우러지면 다리가 훨씬 늘씬하고 길어 보이는 효과를 준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여성들, ‘참아야 하느니라’하면서 신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굽이 10에서 15cm가 넘어가면 걸을 수 있기는 할까. 쉽지 않다. 얼마 전 '2009 SS 프라다 컬렉션'이라는 패션쇼가 열렸는데, 내놓으라 하는 톱모델들이 16cm가 넘는 높은 구두를 감당하지 못하고, 줄줄이 넘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퇴장할 때에 양손에 구두를 들고 서둘러 뛰어나갔다고 한다. 모델로서는 대망신이다. 하긴 9cm 굽의 구두를 신고 자유자재로 걷는 사람, 별로 못 봤다.

다리 건강에도 안 좋다는 얘기가 많다. 전문가들은 굽 높이에 비례해 척추와 발의 건강은 나빠진다고 지적한다. <조선일보>의 오윤희 기자가 얼마 전에 11㎝짜리 킬 힐을 신고, 척추 관절 전문인 서울 양천구 H병원에서 체험 실험을 했다고 한다. 발의 혹사 정도, 이건 뭐 '살인적'이었다고 한다. 두 발의 첫째·둘째 발가락 끝 부분엔 선명한 빨간색 점이 촘촘하게 찍혀 있었다고 한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발가락 사이엔 핑크색 점도 보였다고 한다. 핑크색은 300킬로 파스칼(kPa) 이상, 빨간색은 200킬로 파스칼 이상 되는 압력이 가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정도면 대단하다. 압력밥솥에서 밥이 끓을 때 압력이 약 70킬로 파스칼이다. 4배 이상의 압력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거 오래 쓰면 어떻게 될까? 발가락 뿐 만 아니라 척추에 무리가 간다.

따지고 보면, 하이힐의 역사는 참 오래된 것 같다. 아주 길다. 기원전 4세기 때 그려진 그리스의 테베고분 벽화에도 등장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 때 하이힐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가 신고 있었다고 한다. 멋 내려고 그랬던 것일까. 아니다. 중세 유럽에서는 사람이나 동물의 배설물이 거리에 널려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기왕이면 안 밟으려고 하이힐을 신었다고 한다. 하지만 하이힐의 유행을 이끈 주인공은 절대 권력을 휘두른 루이 14세였다고 한다. 작은 키에 열등감을 가진 그는 커 보이도록 즐겨 신었고, 귀족들이 따라하는 바람에 널리 퍼졌다고 한다. 이 하이힐이 여성만의 특권으로 자리 잡은 것은 100년도 채 안 된다고 한다. 여성들, 대단하지? 엄지발가락이 바깥으로 휘고, 발바닥 근육막에 염증이 생기고, 발목이 삐고, 관절염까지 우려되는 이 구두, 굳이 신으려 하니 말이다.

여성들의 구두, 트렌드에 민감한 것으로 안다. 요즘 같은 불황기에 인기 있는 이유, 무엇 때문일까. 불황과 무관하지 않다. 이승렬 앵커도 이런 얘기 많이 들어보셨을 것이다. ‘불황 때에는 여성의 스커트 길이가 짧아진다’는 속설 말이다. 사실 불황기 때면 생산 주체인 남성들이 의기소침해 고개를 푹 숙인다. 이런 남성들의 싸늘한 시선 앞에서 여성들은 시선을 사고 싶어 한다. 그러다보니 더 돋보이는 외양, 즉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다닌다는 것이다.

‘킬 힐’과 불황의 함수 관계는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미니스커트를 선호하는 여성의 심리, 거기에서 유추할 수 있다. 시선을 끌고 싶은 욕망. 바로 이것이다. 여성들이 킬 힐을 신으면 각선미와 관능미를 돋보이게 하는 효과가 발생한다. 따각따각 소리를 내며 걷는 자체로 주변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다. 각종 미인대회에 나오는 여성이나 연예인, 레이싱걸이 하이힐을 신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실제로 힐의 높이가 올라갈 때 마다 여성들의 스타일 매력 지수 또한 점점 높아진다는 통계도 있다.

‘킬 힐’ 현상을 통해 본 우리 세태 풍속도, 짚어보자. 불황이든 아니든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여성의 욕구는 흉이 될 수 없다. 불황기를 이기려는 의미의 패션 변화 역시 탓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건강을 해치면서 킬 힐을 선호하는 현상, 더불어 아름다움을 위해서 과한 성형도 마다하지 않는 현상. 과유불급이란 말을 떠올리게 한다. 관념적인 이야기일 수 있다. 다리가 짧아도, 몸매 각 부위가 좀처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하더라도, 인간미 넘치는 심성과 양심으로도 그 단점이 충분히 덮어지는 시대. 아름다움의 다양성이 존중받는 시대가 아쉬운 오늘이다.

(이 내용은 월~금 오전 6:35경 SBS러브FM '이승렬의 SBS전망대' 시간을 통해 라디오로도 들으실 수 있습니다. SBS러브FM 주파수는 서울, 인천, 경기 일원에서 들을 수 있는 103.5MHz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