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마다 개강 첫 주가 지나면, 수강 변경 신청을 받는다. 이게 끝나면, 폐강될 과목들이 결정된다. 10명에서 20명 정도 최소 수강 정원을 채우지 못한 과목들이 그 대상이 되겠지? 올해 결과를 보니까 놀라웠다. 폐강 과목 면면을 보면, 학교는 달라도 차이는 별로 없었다는 점이다.

보통 점수 짜게 주거나 과제물 많이 주는 교수들의 과목이 폐강되는데, 대학마다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고려대에서는 총 105개 강좌가 수강 목록에서 사라졌는데, 교양 과목을 가장 많이 개설한 문과대학에서는 '독어독문학 탐색'을 비롯한 문학 강의, '동아시아 문명사'와 같은 역사 강의, '문화의 철학적 이해'라는 철학 강의들이 줄줄이 폐강 목록에 올랐다. 문학 역사 철학. 이런 인문학 분야를 줄여 ‘문사철’로 부르지? 연세대 역시 문사철이 외면당했다. 폐강된 교양과목 13개중 절반이 인문학 강의였다. 서울대의 경우도 폐강이 거의 확실한 4개 과목 중 2개가 인문학 강좌였다고 한다.

인문학 기피 현상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전공뿐 아니라 복수전공 선택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주요 대학마다 취업에 유리한 경영학과는 복수전공 신청자가 정원을 초과하는 반면 인문학과는 ‘수강생 기근’에 시달리고 있다. 서강대는 2007년 1학기에 국어국문학과 사학, 철학, 종교학 같은 인문학 전공분야를 복수전공하는 학생은 80명뿐이지만 경영학은 878명으로 인문학의 10배를 넘어선다. 경희대와 한양대 모두 경영학이 인문학의 2배에 이른다. 대기업이 신입사원을 채용할 때 인문학 전공자를 우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점, 경영학 마인드를 갖춘 인재를 원하는 추세라는 점. 이것이 배경이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일까. 폐강 정도가 아니라, 최근에는 과 자체가 없어지는 상황도 발생하고 있다. 몇 년 동안 없어진 철학과가 10여곳에 이른다는 통계도 있다.

그러다보니 요즘 대학에서도 예전처럼 문사철 출신 총장을 찾아보기 힘든 것 같다. 과거에는 학문적 능력과 인품을 갖춘 학자형 총장이 많았으나 최근에는 경영·경제·행정학 같은 실용학문을 전공한 ‘CEO형 총장’이 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금은 교육과학기술부 차관인 이주호 전 한나라당 의원이 17대 국회의원으로 있을 당시에, 1986년부터 2006년까지 10년 단위로 4년제 대학 총장의 전공에 대한 자료를 작성했다. 이 결과 인문계열 총장은 1986년 28.4%에서 4.3% 줄어든 반면 경영학 경제학 사회계열 총장은 35.1%에서 4.7% 늘었다고 한다. 이런 현상,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총장은 학문적 기반도 중요하지만 행정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대학도 요즘은 경영의 영역 가운데 하나가 됐다.

하지만 요즘 경영자 중에 인문학에 심취해 ‘문사철 전도사’로 거듭나는 경우도 많다. 박중진 동양생명 부회장이 대표적이다. 재계에서 문학작품 예찬론자로 통하는데, 작년 9월 22일자 <서울신문>에 박중진 부회장이 기고한 칼럼이 있다. 그 일부를 소개해보겠다. “학생들은 선진국의 경제·경영기법과 연구·기술과 외국어를 습득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기초공사는 고르게 잘 돼야지 어느 한쪽이라도 부실하면 건물을 높게 올리는 것은 고사하고 안전마저 장담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사회의 근간이 되는 기초학문 가운데 일부를 소외시키고 선진국 문턱을 넘기는 힘들다.”라고 했다. 학교에서는 실용학문에 치여 외면당하고, 서점에서도 실용이나 처세술에 밀려 뒷방지기 신세로 몰락한 인문학의 위상! 박중진 부회장은 이를 “인공호흡기에 연명하고 있는 신세”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힘이 인문학에서 나온다는 지적도 있다. 한 시인이 오바마의 자서전을 읽고는 “오바마의 승리는 문학의 승리”라고 결론지었다. “정말로 글을 쓸 줄 아는, 자신에 대해 감동적이고 진솔한 글을 쓰는 아주 드문 정치인”이란 뉴욕 타임스의 촌평도 있다. 결국 오바마의 소통 능력은 인문학에서 나온다는 얘기이다. 오바마는 대통령 당선 연설에서 말했지? “우리나라의 진정한 힘은 군사력이나 부의 규모가 아니라 우리가 품은 이상의 지속적인 힘, 즉 민주주의·자유·기회, 그리고 굴복하지 않는 희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라고. 경제 위기를 만난 시점에, 전 세계 지도자들이 국민에 ‘이를 극복하자’라고 역설하는 유형이 크게 두 가지이다. “여러분을 부자로 만들어드리겠다”라는 호언장담 유형과, “우리에겐 희망이 있습니다”라는 공감유도 유형 말이다. 오바마는 후자가 되겠지? 경제 위기 극복 또 경제 성장 이것보다 이것의 이면의 가치에 눈을 돌린 것이다.

미국의 최고경영자 중에는 인문학을 전공한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포천지(誌)는 미국 최고경영자의 76%가 대학 시절 인문학 전공자라는 통계를 내놓았다. 이러다보니 미국에서 문사철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뉴욕타임스 보도를 보면, 이라크 전쟁에서 바닥까지 드러난 미국의 도덕성 문제라던가 최근 정치적 관심사에 대해 철학적 관점으로 접근하려는 신세대 학생들이 늘고 있다는 내용이 있다. 철학 전공자가 1990년대와 비교해 2배나 늘었다는 통계도 있다. 물론 여기엔 문사철 교육의 혁신도 하나의 배경이 됐다. 탁상공론식이고 철학고전에 의존하던 교육방식을 뜯어고친 것이다. 그래서 심리학, 경제학 같은 다른 학문과 접목시켰다.

요컨대 학생들이 재미를 느끼게 하는데 성공했다는 얘기이다. 이런 가운데 인문학이 교도소에서 자활기관에서 새로운 활로를 찾고 있다. 철학, 문학, 글쓰기, 역사, 예술 같은 정규 과목과 사회저명인사들의 특강을 통해 삶의 목표를 잃었던 이들에게 용기를 주는 프로그램이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다. 인문학 강의를 들으신 분들, 사회에 대한 눈이 긍정적으로 달라지고, 가족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하게 되었다든가 경제적으로 다시 자립할 수 있게 되는 식의 성과를 낳고 있다고 한다.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배움이 어려운 시기를 해쳐나가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어떤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인문학이야 말로 최고의 실용 학문이라는 인상 안 받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