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트 이야기이다.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에서 나오는 ‘리스트’의 이미지는 참 인간미 넘쳤는데, 요즘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리스트’는 상당히 부정적인 이미지를 남긴다.

과거에 기억나시나? 노태우 정부 때에 ‘정태수 리스트’, 김영삼 정부 때에 ‘김선홍리스트’ ‘청구리스트’ ‘경성리스트’, 김대중 정부 때에 '진승현 리스트' '조동만 리스트'가 있었다. 그러나 사실, 해양수산부 장관의 사법처리로 이어진 '신성해운 리스트'처럼 수사 성과를 낸 리스트는 극히 드물다. 이 ‘신성해운 리스트’를 포함해 노무현 정부 시절 ‘정대근 리스트’ ‘박연차 리스트’가 요즘 대두되고 있다. 성격은 다르지만 ‘장자연 리스트’의 존재 여부를 두고도 논란이 뜨겁다.

술자리 시중과 성 접대를 받은 유력 인사의 명단이 있다는 설, 여야를 불문하고 로비 자금이 전달됐다는 설, 이 설이 요즘 뉴스의 구심점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연루된 의혹을 사고 있는 사람들, 한결같다. “나는 그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내가 돈을 받다니 말이 안 된다” “검찰은 뭐하냐, 빨리 날 불러서 억울한 누명 벗겨다오” 이러고 있다. 물론 진실로 이러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말 바꾼 분들이 꽤 있다. 검사가 움직일 수 없는, 피할 수 없는 증거를 내밀 경우, 슬쩍 “대가성이 없었다” “빌린 것이다” “나는 모르는 일이었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교본이 있나보다. 어떻게 정해진 수순을 그대로 밟는지.

이번에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 사건의 경우, 과연 보험성 리스트를 작성했을까. 문제의 리스트가 실재하는지를 놓고 추측과 설이 난무하고 있지만 수사기관은 존재 사실 자체를 부인하고 있다.

리스트 얘기가 나오면 기가 사는 사람이 있고 죽는 사람이 있는데, 사는 사람은 기자, 죽는 사람은 검사이다. 사실 리스트 보도가 시작되면 수사기관은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의혹이 더 커지기 때문이다. 수사범위가 넓어진다는 것이다. 또, ‘리스트가 없음’도 증명해야 한다. 그래야 '졸속 수사'라는 비판을 면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리스트가 있다는 설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면, 즉 의혹이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될 경우, 수사기관은 수사 주도권을 잃게 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최악의 경우는 ‘리스트가 없다고 했는데 나타나는 경우’이다. 1997년 '한보 비리', 1998년 '경성 비리'가 그랬다. 검찰은 그때 만신창이가 돼 버렸다.

리스트는 왜 작성되는 것일까. 정상적인 거래라면 리스트가 필요없다. 영수증을 주고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적절한 거래나 타협에서는 영수증이 오갈리 없다. 그렇다고 돈 준 사람들, 입 씻고 모른 척하도록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법이다. 따라서 별도의 장부를 통해 기록해 몰래 보관하는 것이다. 리스트가 그래서 힘과 돈의 접점에서 형성된다, 배신과 정략의 수단으로 활용된다고들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어느 순간 숨은 회계장부였던 리스트는 살생부가 된다. 제공하는 '이익'과 기대했던 '대가'가 불일치했을 경우에 말이다.

영화 한 편 얘기해볼까? ‘뱅크 잡’이라는 작품이 있다. 2008년에 나온 영국영화이다. 1971년 영국 런던의 한 성인 클럽이었다. 검은 코트 차림의 남자 2명이 사무실로 들어섰다. 경찰이었다. 클럽 주인이 돈을 건넸다. 경찰에게 뇌물을 먹인 것이다. 경찰은 클럽을 나갔다. 주인은 책상 서랍에서 작은 노트를 꺼낸다. 거기엔 지금까지 경찰관들에게 준 뇌물 액수와 날짜가 빼곡하게 적혀 있다. 주인은 이 '뇌물 리스트'를 은행 안전금고에 보관한다.

이 뇌물 리스트는 결국 어떻게 됐을까. 털렸다. 은행에서 금고 째로 말이다. 도둑이 든 것이다. 부패한 경찰관들, 난리가 났다. 은행털이범 사건 수사를 담당하는 경찰관들보다 한 발 앞서 강도들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된다. 잘못하면 감옥에 가게 될 판이니, 수사 관할이고 뭐고 따질 겨를이 없다. 주인도 가세한다. 뇌물 리스트는 '만약의 사태'가 발생했을 때 돈 먹은 경찰관들을 협박해 위기를 모면할 수 있게 해줄 보험증서나 마찬가진데 없어지다니…. 주인은 은행털이범들을 찾아낸다. 그러나 영화의 절정은 바로 이 부분이다. 주인이 뇌물 리스트를 손에 넣기 직전 체포된다. 기막히지 않나. 종이 묶음에 불과한 리스트의 힘, 새삼 실감나게 만드는 영화이다

리스트의 존재 그리고 내용의 진실성 여부가 불명확한데도, 사람들은 믿고, 또 그것이 빠르게 확산된다. 이유가 무엇일까. 그 사회의 투명성과 직결된 문제가 아닐까 싶다. 사실 진실을 누를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있다는 인상이 대중에게 심어지는 순간, 그 사회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비밀이 뭔가 있을 것이다”라는 심리가 빠르게 파급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실체가 불분명한 리스트에 대해 대중은 열광하고 이 내용은 빠르게 전파되는 것이다. 경찰이 최근 장자연 씨 건과 관련해 실명을 유포하는 사람을 쫓겠다고 하는데, 이것이 실효성이 있을지, 또 이런다고 본질적인 해법까지 도출해 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그 사회에 돈과 힘에 휘둘리지 않는, 진실을 추구하는 집단이 있어야 한다. 민주 헌정 체제에서, 이런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아주 이상적인 기구가 있다. 그곳은 바로 사정기관과 사법부이다. 이곳의 판단이라면 권위를 실어주며 승복하는 문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리스트 파문은 정권을 불문하고 계속 돼 왔다. 이것은 결국 사정기관과 사법부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한꺼번에 찾아 온 두서너 가지의 ‘리스트’. 사정기관의, 사법부의 돌파 능력이 주목된다.

 /한양대 겸임교수, 시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