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좌측 남자 진행자가 신경민 앵커

MBC의 간판 뉴스 프로그램인 ‘뉴스데스크’의 신경민 앵커가 14일자로 교체됐다. 이 소식을 접하고는, 전임 ‘뉴스데스크’ 앵커이자, 현 MBC 사장이고, 또 신 앵커 교체를 최종적으로 확정한 엄기영 사장이 불현듯 떠올랐다. 불과 1년을 채우고 떠나는 신 앵커에 비해, 13년 3개월 간 뉴스데스크를 지켰던 엄 사장의 롱런 비결이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엄 사장이 지녔던 ‘미덕’이 혹시 신 앵커에게도 있었다면 혹 1년 만에 하차하는 우여곡절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엄 사장은 노태우 대통령 임기 때부터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이 취임을 준비하던 인수위원회 시절까지 총 5명의 권력자를 앵커석에서 지켜봤다. 그는 대체로 ‘오버하지 않는 앵커’로 평가받았다. 물론 평소와는 달리, 톤이 고조되거나 감정이 격해지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경우라도 권력과 국민감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의 운신(運身)이었다.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의 줄기세포 조작 의혹의 일부가 사실로 드러나던 날, 그러니까 황 전 교수를 상대로 MBC가 이기던 날, 그의 첫마디는 “여러분, 이 뉴스를 어떻게 전해드려야 할까요”였다. ‘MBC가 옳았다’라고 흥분하지 않았다. 여성적 부드러움, 동양적 겸허함의 미덕이 ‘엄 앵커’의 매력이었던 것이다.

이게 부족해서였을까. 아니다. 신 앵커는 애초에 이런 ‘엄기영 프레임’을 추종할 생각이 없었다. 도리어 새 틀을 짜려 했다. 본인의 앵커 역할이 ‘클로징’되던 날, ‘클로징 멘트’에서 신 앵커는, “지난 일 년여, 제가 지닌 원칙은 자유, 민주, 힘에 대한 견제, 약자 배려, 그리고 안전이었습니다”라고 밝혔다. 이들 가치 위에 서 기자 개인의 관점을 표현했던 것이다. 덕분에 신 앵커는 남자 앵커 선호도 조사 결과, 1위(리얼미터)에 올랐다. 멋진 후임자가 그 자리를 훌륭하게 이어받을 때, 전임자도 빛나는 법. 이런 신 앵커를 흡족하게 여겼을 법한 엄 사장은 그런데, 무리수를 둬 신 앵커를 교체했다.

엄 사장은 신 앵커 하자 결정의 배경으로 ‘(신 앵커가) 균형감과 공정성이 부족했다’는 점을 들었다. 그러나 선수들이 모를 리 없다. 이 논란의 핵심이 균형감 및 공정성과 무관하다는 것을. 또 ‘신 앵커가 권력에게 눈 밖에 났다’라는 ‘불편한 진실’에 그 배경이 있음을 말이다. 실제 MBC 보도본부 차장·평기자 비상대책위원회는 교체하던 날 당일에 “청와대가 오래전부터 신경민 앵커의 교체를 노골적으로 요구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엄 사장은 “정치적 압력 따위는 없었다”고 선을 그었다.

권력이 배후가 됐건, 엄 사장이 알아서 기었건, ‘앵커의 코멘터리’를 불온하게 여기는 이 사회의 관습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 이제 공론의 장에서 논의해야 한다고 본다. 미국에서는 대통령 선거가 임박하면 신문마다 사설을 통해 특정후보에 대한 지지 입장을 밝힌다. 한국적 정서에서는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다. ‘어떻게 공적 매체가 특정 후보에 대해 대놓고 지지 입장을 표명할 수 있나’라고 하거나 ‘이러는 이유는 결국 권력 차원의 반사이익을 취하려는 의도 아닌가’라고 오해하는 이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미국 언론의 전통은 미국민의 높은 정치적 식견과 판단력을 반증한다. ‘언론이 뭐라 한들 독자들은 다양한 여러 의견 가운데 하나로 인식할 것’이라는 믿음이 반영돼 있기 때문이다. 뒤집어 이를 매우 낯설게 여기는 우리네 정서 이면에는 ‘언론이 저렇게 특정 후보를 지지하면 (뭘 잘 모르는 국민들이) 현혹되지 않겠나’하는 의식이 깔려 있다. 사실 신 앵커의 코멘터리는 분명히 어느 한 쪽에서 듣기 불편했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앵커 교체의 핵심 사유라면 ‘우리 국민의 수준이 아직 낮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딴지일보’라는 패러디 신문의 총수 김어준 씨가 했던 말 중에 아직도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이 있다. “나는 편파적이다. 그러나 편파적이기까지 그 과정은 공정했다”라는. 신 앵커 교체 논의에서 ‘그의 멘트가 억측, 편견 그리고 정확하지 않은 데이터에 기초해 국민의 알 권리를 기만했는지’ 따위의 근본적인 시비 검증이 전혀 없었다는 점은 심히 유감이다. 한편 일부 언론은 “‘신 앵커 때문에 MBC에 광고 주려는 기업들이 없다’라는 주장이 경영진 내부에서 나왔고 이것이 이번 결정의 또 다른 배경이 됐다”라고 전했다. 권력 뿐 아니라 자본에까지 굴복했다는 이야기일까. ‘잔인한 달’로 알려진 4월. 한국 언론의 2009년 4월은 잔인함을 넘어 잔혹하기까지 하다.

* 일간지 '아시아투데이'에 보낸 칼럼입니다.

/ 시사평론가, 한양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