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이었다. 노무현 정부 시절, 사학법 개정 논란이 한창일 때였다. 당시 보수 기독교계는 ‘사학법 개정에 반대 한다’며 삭발 투쟁도 불사할 만큼 격앙됐다. 비슷한 시기, 과거 재직했던 극동방송에서 이와 관련한 토론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우연찮게 들었다가 놀라운 부분을 발견했다. 여기에 나온 패널이 모두 셋이었는데, 이들 모두 '같은 입장'이었다는 점이다. 마이크 앞에 세 사람이 보수 기독교계가 주장했던 그 논리 그대로를 복창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화가 났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예를 들어보자. MBC 구성원 다수가 미디어 관련법에 대해 반대한다고 자사 프로그램인 ‘100분 토론’에 자기들 입장을 대변해줄 패널들만 앉힐 수 있을까. 만약 이렇게 했다면 뉴 라이트를 비롯해 친정부 세력들로부터 당장 문제 제기 당했을 것이다. 아니 이보다 앞서 담당 CP에게 ‘기본이 안 된 놈’이라며 욕을 진탕 먹었을 것이다.

방송 중에 극동방송 주조정실로 전화했다. PD와 연결됐다. 그런데 후배였다. 차분함을 지키려 했지만 언성이 높아지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사학법 개정 문제에 대해 지금 나온 패널들의 입장과 달라서 화를 내는 것일 수도 있어요. 그러나 이보다 앞서서 방송의 기본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네요. 적어도 토론의 형식을 띄는 것이라면 명실상부하게 찬반 양쪽으로 나눠 균등하게 패널을 구성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삼인일색으로 할 거면, 뭐 하러 셋이나 불러요. 한 명만 부르지.”

그러나 나는 후배의 한마디에 무너지고 말았다. “에이, 선배님, 알면서 왜 이래요?”라는. 그렇다. 그 후배 자리에 믹서 앞에 내가 콜 주고 앉아있었다면 나도 후배에게 요구한 ‘기본’ 또는 ‘용기’를 사수할 배짱이 없었을지 모른다. 만약 패널 구성을 찬반 양쪽으로 나눠 출연시켰다면 친미 극우 성향의 김장환 사장(현 이사장)의 정치적 지향점에 반하는 것이기에 심각한 뒷탈을 감수해야 했을 것이다. 사장의 절대 카리스마에 할 말 할 행동 가려야 한다는 강박은, 퇴사한지 9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내 꿈자리를 가끔씩 뒤숭숭하게 하는 요인이다. 이런 회사에 공정방송실천기구나 노동조합 같은 내부 감시 시스템이 작동할 리 만무하다. 이러다보니 사장의 전횡은 시간이 갈수록 도를 넘게 된다. 아울러 사장의 신임을 받는 간부들이 기득권의 실과 일부를 나눠 먹게 되는 상황도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일까. 극동방송에서 최근 벌어진 ‘사건’은 여러가지를 시사한다. 새롭게 부임한 김은기 사장이 아들 김 모 씨를 정규직 사원으로 채용하고, 부인 이 모 씨를 DJ로 기용한 것이다. 미디어 비평 신문인 <미디어오늘>이 취재에 들어가니까 극동방송의 한 간부는 ‘극동방송의 특수성을 모르고 하는 지적’이라며 방어막을 쳤다. 아들 김 모 씨는 여러 인턴사원들과 일하다가 함께 정규직으로 승격된 것이고, 부인 이 모 씨는 과거 방송에서 일한 경력이 있으며 무보수로 봉사하는 것이란 해명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사장일 때 아들이 정규직이 됐고, 남편이 사장일 때 부인이 DJ가 된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만약에 엄기영 문화방송 사장이 자기 아들을 MBC 정규직 사원으로 채용하고, 부인을 MBC FM4U DJ로 기용했다고 치자. MBC와 각을 세우는 이른바 ‘조중동’이 가만히 있을까. 당장 시비를 가리자며 덤빌 것이다. 두뇌가 제 위치에 제대로 장착된 MBC 간부라면, 이 ‘조중동’ 앞에 “아들이 다른 인턴들과 함께 채용된 것” “부인은 MBC를 위해 무보수로 일하는 것”이라는 해명 논리를 펼 수 있었을까.

<미디어오늘>를 보고는, 이 신문의 취재에 응한 그 간부에게 ‘그게 말이 됩니까’라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에이, 알면서 왜 이래”라는 답을 들을까봐 차마 수화기를 들지 못했다. 아주 혼란스럽다.

▲ CBS에 비해 자신들이 더 순수하다는 점을 입증하려면, 문서로 만들어 강변하기 보다 실천을 통해 입증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진출처=극동방송 가이드북 '바로 알고 더 사랑하기'의 일부분)

그러나 이 문제만은 지면으로나마 이야기해야겠다. ‘특수성’이란 실체도 없는 허깨비 뒤에 비겁하게 숨지 말라고. 극동방송은 저마다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될 것을 자임하는 종교방송 중 일원이다. 그렇다면 세속 사회의 합리적인 기준과 양식을 그 어느 곳 보다 엄중하게 준수해야 옳다. 채용 문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요즘처럼 취업난 시대에 수많은 지망생들은 ‘이 회사만은 사람을 공정하게 뽑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고 입사 원서를 넣을 것이다. 따라서 종교방송이 인력을 선발할 때, 유력한 인사의 자제는 물론, 후원금을 ‘화끈하게’ 내는 인사의 자제, 또한 현직 간부들의 자제들에게 프리미엄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들의 가늠하는 바에 어느 한 구석 틀린 부분을 찾기 힘들다. 따라서 이들의 기대치에 맞춰줘야 옳다.

‘목회직 대물림’라는 기가 찬 수사를 동원해 ‘교권 세습’의 추행을 합리화하는 보수 기독교계의 오도를 꾸짖고 감시해야 할 몫까지 극동방송이 수행해 줄 것을 바라지 않는다. 어차피 그들이 수입원인 이상엔. 그러나 최소한 닮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있다.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한 한 극동방송 직원은 “극동방송이 종교방송이어서 인사도 투명하게 이뤄질 것으로 기대하는 입사 지망생들에겐 참 미안한 일”이라고 이야기했다. 사실 이 직원이 미안해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다만 이 직원에게 바라는 바가 있다. 나중에 높고 힘있는 자리에 올라갔을 때, 자기 아들, 딸을 위한답시고 자사에 채용하는 우를 범치 말라고 말이다. 그랬다가는 본인의 자녀의 앞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명예에도 먹칠할 수 있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