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사임한 대통령 닉슨은 헐리우드 영화에서 가장 사랑받는 인물 중 하나다. 한때 미국 대통령으로서 최고의 권력을 가졌지만, 워터 게이트 사건으로 순식간에 모두에게 비난 받는 자로 전락했기에 닉슨의 이야기는 영화 소재로서 무척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사진은 <프로스트 vs 닉슨>의 한 장면 ⓒ UPI코리아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이 정계 그리고 관계에 로비를 했다는 의혹, 그동안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로 미뤄졌다. 이제 재개될 움직임이다. 이른바 ‘박연차 게이트’의 재개봉박두라 하겠다. 이런 가운데 야당인 민주당은 ‘박연차 게이트’ 말고, 살아있는 권력의 비리 의혹을 쫓는 '천신일 게이트'에 대한 수사가 필요하다며 연일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런 가운데 포장조차 안 뜯어본 정대근 전 농협중앙회장의 로비 수사, 즉 ‘정대근 리스트’ 역시 언제 터질지 모른다는 점에서 정치권을 긴장하게 만들고 있다. 이른바 ‘게이트’ 전성시대이다.

‘문’을 뜻하는 게이트(Gate). 왜 비리 수사 때마다 ‘게이트’라는 말이 나올까. 사건의 진상이 무엇이고, “최종적인 배후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비밀의 방, 그 방으로 들어가는 문을 ‘게이트’로 상징화한 것이다.” 잘 모르는 분들은 이렇게도 이야기한다. 그럴 듯 하지? 하지만 어원이 따로 있다. 정확하게는 워터게이트라는 빌딩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정리해보자. 1972년 6월 17일 새벽, 워싱턴의 워터게이트빌딩에 입주해 있던 '민주당전국위원회' 본부에 누군가 도청장치를 설치하려 했다. 알고 봤더니 공화당 소속 닉슨 대통령의 측근들 소행이었다. 닉슨은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했지만, 나중에 ‘모르는 일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면서 결국 책임을 지고 권좌에서 물러났다. 역사는 이 사건을 ‘워터게이트’라고 불렀다. 여기서 게이트는 관형어 역할밖에 하지 않았는데 어느새 스캔들의 의미까지 포함한 새로운 단어로 탈바꿈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박동선 씨의 ‘코리아게이트’가 원조 격이다. 1976년 유신정권이 미국에 살던 교포 기업인 박동선 씨를 통해 미국 의회에 불법로비를 했다. 결국 걸렸다. 그러자 미국 언론은 이걸 코리아게이트라며 우리 정부를 비난했다. 하지만 무대가 미국이어서인지 우리 국민에게 그다지 피부에 와 닿지는 않았다. 군사정권 때만 해도 사실 권력형 비리를 견제할 사회적 장치가 전무하다시피 했다. 정권이 살아있는 동안, 권력 인사들의 비리를 캐서 단죄하는 것은 고사하고, 그 비리의 실체적 진실에 다가갈 수 있을만한 단서 또는 정보조차 없었다. 물론 지금이야 민주화되고 언론의 자유가 성숙돼 있는 상황이니 과거와 비교할 여지는 없다.

진짜 '한국적 게이트'는 김대중 정부 후반에 폭발적으로 발생했다. 2000년 가을부터 이듬해에 걸쳐 잇따라 터진 정현준, 진승현, 이용호 게이트 같은 이른바 '3대 게이트'에다 정권 막바지 윤태식, 최규선 게이트도 있었다. 대개 중소사업인과 정보기관, 여권인사들이 뒤엉켜 빚은 부패스캔들이었지? 재벌기업이 선거자금을 차떼기로 넘긴 '트럭게이트'는 당시 야당이 관련된 아주 이례적인 케이스였다.

한국에서의 게이트는 연줄을 통하는 것이 특징이다. 금융기관에서 오랜 세월 여신업무를 다뤘던 J씨가 나름대로 분류한 것이 있다. 재벌들이 대출을 받기 위해 벌이는 로비형태인데. 이걸 <서울신문>이 소개해 주목받았다. A그룹은 ‘전방위’, B그룹은 ‘톱다운’, C그룹은 시쳇말로 ‘무데뽀’라고 한다는 것이다. J씨는 여기서 특히 A그룹의 경우 로비의 치밀함이 상상을 초월한다고 털어놓았다고 한다. 파도타기처럼 1차, 2차, 3차, 4차 접근하는 인물도 다를 뿐더러 점점 더 거부하기 힘든 존재로 로비하는 사람들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처음엔 학교 동창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러다 마지막에는 친인척의 ‘밥그릇’이 걸린 사람이 찾아온다는 얘기다. 결국 두 손을 들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탓에 몇몇 대기업에서는 신입사원들에게 ‘지인(知人)’란에 입법·사법·행정기관은 말할 것도 없고 언론·금융기관 같은 유력기관에 근무하는 친인척을 기재하게 한다고 한다.

퇴직 공무원을 이용하는 경우도 많다. 고무도장 즉 인 허가권을 움켜쥐고 힘깨나 쓰는 정부 부처에 근무한 국·과장급 이상 공직자들인데. 이 사람들, 퇴직 후에도 ‘고문’이라는 직함으로 민간 기업에 둥지를 트게 된다. 이들은 사실 로비스트의 역할을 맡는다. 한때 국내 정상급 재벌 건설회사는 건설부, 조달청, 서울시, 국세청에서 퇴직한 고위 관료 출신 20여명을 고문으로 영입한 적이 있다. 이사급에서 부사장급까지 대우는 다양하지만 하는 일은 전 직장의 후배들을 찾아 가서 밥과 술을 사고 정보를 귀동냥하는 것이다.

4년 전 노무현 정권 실세로 불린 인사가 사석에서 한 말이 있다. “우리는 다음 정권에서 게이트로 불릴 만한 측근 비리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왜냐. 전 정권이 항상 게이트로 먹칠했는데, 바보가 아닌데 서야 우리마저 그러겠냐는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 전 대통령의 후견인, 학교 동문들이 범죄계보도로 그려지더니 측근 대부분 심지어 자신의 형, 조카사위에 이어 아내와 아들 심지어 본인까지 줄줄이 검찰의 수사선상에 올랐다. 현 정권의 전 정권 죽이기 기획 수사라는 주장도 있지만, 빌미를 제공한 책임마저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게이트는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포위되는 상황 속에서 발생한다. 결벽증 같이 거부 반응을 보여야만 얽힐까 말까 하는 것이다.

개선책. 물론 있다. 권력을 실효적으로 감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사정 기관 특히 대통령 친인척 측근을 관리하는 민정 기구의 수장 자리를 대통령의 지인 또는 측근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 검찰이, 살아있는 권력에 대해서도 눈치 안 보고 수사할 수 있도록 여건과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 그러나 이게 쉽지 않다. 권력의 맛은 너무나 달콤하거든. 그래서 특정인에게 쏠려 있는 권력을 분산할 수 있는 헌법 차원의 개선 노력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물론 이게 최선의 해법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차악의 해법 정도만으로도 개선 효과가 있지 않겠냐는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