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그렇겠지만 우리 어머님은 특별히 강인한 어머니였습니다.
여자에게는 글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유교문화의 가부장적 전통아래 있는 함양박씨 둘째 딸로 태어나신 어머니는 신식교육은 못 받으셨지만 개방적 사고를 가졌던 외할아버지의 배려로 한글은 물론 유식하다고 인정받을 만큼의 한문 실력을 겸비한 분이셨습니다. 경상도 북부지역의 유림(儒林)이며 한학자의 아들이라는 것 하나만 믿고 방년 18세에 두 살이나 어린 16세의 우리 아버지와 결혼을 하여 공주이씨 가문의 며느리가 된 우리 어머님의 삶은 처음부터 고난의 삶은 아니었습니다. 이름(栒) 대신 사현(士賢)이라는 호(號)로 불리시던 조부님은 유학자이면서도 한의사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한의사라는 직업이 양반이나 유학자들에게는 그렇게 자랑스러운 직업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일제 강점기 시대에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선택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한문 실력이 있으니 의서(醫書)를 읽기에 별 문제가 없고 또 남을 도울 수 있는 기술(仁術)이니 별로 부끄러운 일은 아니라고 판단하셨을 것입니다. 아버지 역시 귀한 집 외아들로서 평생 하신 일이라고는 갓 쓰고 글 읽는 일 뿐이셨다고 합니다. 대종가(大宗家)는 아니지만 꾀 넓은 문중의 종부(宗婦)이기도 하셨던 어머님의 2,30대의 젊은 시절의 삶은 나름대로 품위 있는 삶이셨습니다. 19세에 맏아들(在榮)을 낳고 계속하여 5남매를 낳으신 어머님은 맏아들을 중학교에 보내어 신식교육을 시키고 또 전주이씨 며느리를 맞아 40도 안된 젊은 나이에 시어머니가 되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일제(日帝)에서 해방되는 민족적 감격도 잠시 우리 민족에 다가온 6.25라는 비극은 우리 어머님을 품위 있는 안방마님의 지위에서 끌어내려 생활 전선에 뛰어 들어 그 숱한 고난의 여정을 시작하게 했습니다. 전쟁 중에 문중의 희망으로 기대되었던 그렇게 자랑스러운 맏아들을 잃고 남편마저 사별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신 것입니다. 불행은 가세를 기울게 만들고 강직한 선비였던 조부님은 “내 아들도 못 고치는 무능한 의사가 어떻게 남의 병을 고치겠느냐?”고 한의사를 접어버리고 몇 마지기 안 되는 농사에 가족의 생계를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조부님의 결단은 실리보다는 명분을 중시한 유학자의 사고방식으로는 당연한 것이었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참으로 위험천만한 결정이었고 특히 어머님에게는 참으로 야속하고 절박한 일이었습니다. 선비로 살아온 어른이 손에 익숙하지 않은 농사일은 과부가 된 며느리가 거들어도 참으로 힘겨운 일이었고 거의 모든 농사일을 집안 어른들에게 의지해야하는 농사일은 참으로 우리 어머님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힘겨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님은 강하셨습니다. 강직한 성격으로 그 와중에도 양반의 체통과 명분을 버리지 못하신 시부모님과 청산과부가 된 20대 초반의 젊은 며느리, 올망졸망 남아있는 철없는 4남매와 유복자로 태어난 손자를 책임진 40대 초반의 과부로 가정 살림을 책임지신 어머님은 나의 기억에는 한 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완고한 시부모와 종부(宗婦)라는 멍에에도 불구하고 병상에서“예수 믿고 예수님 의지하고 살라”는 아버님의 유언을 생명줄처럼 붙잡고 과감히 신앙을 받아들여서 유교 문화의 가정 전통을 기독교 문화로 바꾸신 어머님의 결단은 어머님이 가진 강인함 때문에 가능한 축복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린 어머님의 묘비를 “우리 가정의 신앙의 선구자이자 자랑스러운 어머니이시며…….”라고 썼습니다. 어머님은 나의 신양교회 위임식을 보신 뒤 고향으로 내려가셔서 곧 바로 자리에 누우시고 목사가 된 두 아들과 장로가 된 손자 등 애지중지하던 가족들을 남겨두시고 눈물을 보이시지 않기 위해 더욱 더 혼자 흘리셨을 그 눈물을 닦아주실 하나님의 품으로 떠나셨습니다. 저는 회갑을 지낸 나이가 되면서 이맘때면, 그리고 어머니날을 맞을 때마다 너무너무 어머님이 보고 싶습니다. 아직도 그 강인하신 어머님이 남기고 가신 빈자리가 허전합니다.

/신양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