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상의 오지, 감비아 땅, 어디 없는 것이 한두 가지며 먹고 싶은 것이 한 두 가지일까. 일 년 내내 나오는 과일이라고는 망고 한철, 오렌지 한철이 고작이다. 야채라야 양파, 그리고 이들이 먹는 이상한 풀들, 우리나라에서는 먹지도 않는 비름나물 같은 것이 고작이다. 요즘은 그래도 인근 아프리카 국가들인 라이베리아, 시에라리온 등지에서 내란을 피해서 감비아로 몰려온 사람들이 세운 작은 슈퍼마켓이 있어서 필요한 것은 어렵사리 구할 수 있게 되었지 만 말이다.

이곳에서 먹을거리하면 언제나 먼저 떠오르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김치였다. 고국에 있을 때는 김치가 그렇게 좋은 것인 줄은 모르고 살았는데, 이곳에 온 이후로는 향수의 가장 자리에는 반드시 김치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심한 말라리아를 앓고 있을 때는 만사가 귀찮고 식욕도 없다. 그 와중에서도 시원한 김치가 있다면 벌떡 일어나 밥이라도 먹고 기운을 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릴 때 고국을 떠나온 아이들이야 그런 말을 하지도 않지만 아내는 특히 김치 이야기를 많이 한다. "안식년이 되면 엄마에게 부탁해서 맛있는 깍두기를 만들어 달라고 해서 그것만 매일 먹어야지, 포기김치를 만들어 밥 위에 척 걸쳐서 매일 먹어야지." 아내는 마치 어린아이같이 김치 타령을 한다. 어느 날 한국에서 누가 보내준 여성 잡지를 읽던 아내는 마침내 무슨 발작이라도 하듯이 소리를 지르며 미친 듯이 입맛을 다시고 야단이었다.

그 책 김치 요리란에 컬러로 나온 김치 사진을 보고 그 야단이었다. 세상에 어른이 방정맞게 그 야단을 친다며 핀잔을 주기는 했지만 사실 입맛은 내가 훨씬 더 많이 다셨다. 이곳에 온 이후로 무엇보다도 많이 시도해 본 것이 배추 심는 일이었다. 그것도 다른 때는 안 되고 이곳 날씨가 조금 서늘한 12월, 1월에만 가능하다. 한국에서 보내온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면 그 모래 더위를 이기고 올라오는 파란 싹을 보는 것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아침에도 물, 점심에도 귀한 물을 주며 자라주기를 바랬던 우리의 기도는 감비아 청년들의 신앙이 자라 주기를 바라며 기도했던 것 못지않게 간절했다고 생각한다. 우스운 말이기는 하지만. 그런데 그 배추의 떡잎이 나와 자라기가 무섭게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배추벌레들이 나타나 남김없이 갉아먹어 버린다. 아무리 잡고 또 잡아도 벌레들도 결사적이다 이 삭막한 땅, 메마른 들판에 나타난 파란 잎을 본 벌레들도 아마 우리 같이 제 정신이 아닌 것이다.

죽이면 죽이는 대로 각오하고 몰려와 그 가엾은 파란 배춧잎을 철저하게 갉아 먹어버린다 밤새 그 귀한 배추 잎을 갉아 먹고 파랗게 살이 오른 벌레를 잡는 나는 차라리 진노한 그 자체였다. 잡아도 끝이 없는 벌레들에 못이긴 채 배추도 그만 시들시들 이 더위에 말라가고 있었다. 너무나 애처로워 배추를 쓰다듬으며 나는 그만 악에 받쳤다. 나는 소문 소문해서 감비아의 농림부 창고에 가면 농약이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이 농약은 채소에 뿌릴 수 없는 독한 것이라고 했지만 그래도 한 병을 구해왔다 농약이 대기하고 있는 줄도 알지 못하는 배추벌레들은 아직도 열심히 줄기도 채 남기지 않은 애기 배추를 갉아먹고 있었다.

"그래, 우리도 못 먹고 너희도 먹지마라." 나는 눈물을 찍어내며 남은 농약을 배추 밭에 쏟아 부었다. 가여운 배추는 채 30분이 되지 않아서 녹아 내려 버렸다. 악착같이 뜯어먹던 배추벌레들도 고통으로 한두 번 꿈틀대더니 마침내 그 입짓을 멈추었다. 한두 번 이런 일을 당한 뒤부터는 아예 배추 농사를 포기했다.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나이지만 이런 일은 해보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밖에 나갔다 들어오던 아내가 소리를 지르고 야단이었다. 그의 손에는 한 포대 가량의 양상추 같은 것이 들려있었다.

"배추를 구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비명이었다. "배추라니, 감비아에서?" 그녀의 손에는 무슨 작은 양배추 같은 덩어리들이 가득했다. 어디 가서 양상추를 사가지고 와서 어른이 호들갑을 떤다며 핀잔을 주었다. 배추라며 우기는 그녀의 성화에 못 이겨서 찬찬히 들여다보니 모양이야 어른 주먹보다 조금 큰 양배추 같은 것이었지만 배추임이 분명했다. 감비아에 살고 있는 500여명의 중국 사람들이 어떻게 기술적으로 심어서 키운 것을 얻어왔다는 것이다.

'야, 이곳에서 배추를 구하다니' 우리는 한국에서 보내왔던 고춧가루와 감비아에서 나는 매운 고춧가루를 섞어서 김치를 만들었다. 정말로 김치가 되었다. "김치야, 너 본 지 오래구나!" 무슨 김치에 한이라도 맺힌 사람들처럼 우리는 먹었다. 그랬다. 한이 맺혔던 것이다 아침에도 빵에다 김치, 점심에도 감비아 밥에다 김치, 저녁에도 김치, 이제 김치 한 가지면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더 이상 말라리아도 겁나지 않을 것 같았다. 자다가도 부엌으로 나간 아내는 입맛을 다시며 들어온다. 김치를 먹고 들어오는 모양이다.

우리 집에 들락거리는 동료 서양 선교사들이 집안에 무슨 이상한 냄새가 난다며 야단들이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감사하게도 동료 서양 선교사들이 김치를 먹을 줄 모르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모른다. 그들도 본국에서 먹던 맛있는 치즈를 그리워했겠지만 여하튼 그 친절한 중국인은 자기들이 재배해서 성공하면 또 가져다주겠다고 했겠다. 우리는 김치는 먹을 수 있게 되었다며 살판이 났다고 희희낙락했다. 이제는 감비아 사람들이 먹는 동물용 쓰레기 쌀밥이라도 상관하지 않았다. 김치가 있었으니까.

이렇게 며칠 동안 오직 김치만 먹었던 나의 위장이 괜찮을 리가 없었다. 평소에도 늘 건강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오랫동안 매운 것을 먹지 않았던 위가 갑자기 밀려들어오는 매운 김치를 감당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속이 쓰리고 아프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것조차도 아랑곳하지 않고 김치를 먹고 또 먹었는데, 위는 점점 더 아프고 쓰려오기 시작했다. 밥을 먹어도 불편하고 안 먹어도 불편했다. 아마도 탈이 나도 단단히 간 모양이었다.

죽을 먹으면서도 김치의 유혹은 도저히 뿌리칠 수가 없어서 아내 몰래 김치를 한 입씩 반찬으로 먹었다. 위장의 상태는 점점 더 나빠지는 것 같았다. 급기야 나는 영국 정부가 하는 열대병 연구소(MRC)로 가서 진찰을 받았다. 내 위는 붓고 많이 상해 있다는 것이다 이제부터 음식을 조심해야 하고 아마도 한 달 이상은 치료를 받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위에 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다시 먹기 싫은 죽을 먹으며 마른 감비아 빵을 먹어야 했다. 옛날 위장병으로 많이 고생한 적이 있는 나를 기억한 아내는 남편의 위장병이 걱정된다며 한 주간 작정으로 금식 기도를 시작했다. 정작 부끄러운 자세로 금식기도를 해야 할 사람은 나인데도 말이다. 어차피 우리는 더 이상 김치를 먹지 못하게 되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중국 사람들도 더 이상 배추를 가져다주지 않았다.

우리는 마치 김치 꿈을 꾼 사람들 같았다. 잡지 그림 속에서 보았던 그 김치를 향한 애절한 그리움을 맘껏 풀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한차례 배려를 해 주셨다고 믿고 싶었다. 가스냉장고 속에 먹다 남아 있는 김치냄새가 마침내 싫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치 하나도 포기 못했으면서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선교사로 간다'며 거창하게 한국을 떠나왔던 우리 자신들이 너무도 한심하고 부끄럽다.

/ WEC 선교회 한국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