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은퇴한지 1년 9개월이 되어간다. 은퇴하기 위해 덕소로 이사 온 지는 거의 2년이 되어간다. 교회당 옆에 위치한 목사관을 수리하고 추운 계절이 오기 전에 후임자로 하여금 이사 오게 하기 위함이었다. 사실, 우리가 12년 동안 살던 목사관은 한옥을 현대식으로 리모델링을 하였으나 워낙 낡은 구조인 탓인지, 여름이면 덥고 겨울이면 언덕으로 몰아치는 북풍(北風)을 이겨내기가 버거웠다. 겨울이면 엄청난 가스비를 부담해야 했다. 그러므로 후임자 가족들에게는 그런 고통을 넘기고 싶지 않아서 교회에게 수리를 잘 해달라고 특청했다.

은퇴한 후에 교회로부터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이 덕이 된다는 선배들의 권유에 따라 덕소에 위치한 아파트로 처소를 정했다. 아파트의 삶은 처음이었다. 낡은 주택에서 살다가 아파트로 이사 오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거하던 목사관은 폭우가 내리면 넘쳐나는 물로 신발이 젖어야 다닐 수 있었고, 폭설이 내리면 관리인과 더불어 제설 작업에 진땀을 빼야 했다. 그런데다가 목사관 옆으로 동네 길이 난 관계로 오가는 사람들 소리가 시끄럽기 그지없고 목사관 대문 앞에 몰래 버린 쓰레기로 집사람이 언제나 고통을 감내해야 했었다.

그러나 아파트 창으로 보이는 폭우나 폭설은 오히려 시정(詩情)을 느낄 정도로 낭만적이다. 아무리 더운 여름날이라도 에어컨 없이 지날 수 있고 강추위에도 가벼운 옷차림으로 지내도 문제가 없다. 참으로 인생 종반기에 이런 복을 누리게 하시다니 하나님께와, 이렇게 불편함이 없도록 배려해준 교회 지도자들분께 깊은 감사를 하고 싶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은퇴한 후의 삶이 후임자나 교인들에게 존경을 잃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다. 한국교회 안에 많은 교회들이 원로목사와 담임목사 간에 갈등으로 시험에 드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금번 예장 고신측 총회에서는 원로목사 제도를 폐지하자는 안이 크게 일 정도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 교단의 총회장을 역임했던 정판술 목사(사직동 교회 원로목사)는 원로목사제도의 폐단은 (1)한 교회에서만 특정 시무 연수(대부분의 교단들의 경우 20년)를 채울 것 (2)교수 또는 선교사 등 소명의 차이로 사역하다 퇴임할 경우 추대 되지 못함 (3)후임 목회자와 교회에 대한 부담감 (4)작은 교회에서 은퇴하는 목회자에게는 있으나 마나 한 제도 (5)원로목사와 후임 목회자 간의 갈등 등으로 폐지의 이유를 들었다.

사실, 어느 교회 원로 목사는 은퇴한 후에도 매주 본교회 예배에 참석하거나 한 달에 한번 설교를 한다고 한다. 심지어 원로목사실을 두고 사사건건 간섭을 함으로 담임목사가 소신껏 목회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한다. 아무리 자기의 전생을 바쳐 성장시킨 교회일지라도 그런 추한 노욕(老慾)으로 교회 발전을 저해한다는 것은 사울왕의 재판(再版)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이 이루신 일을 자기의 업적으로 돌리는 교만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그런 폐단을 막아야 한다는 소리가 총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지 않는가?

그러한 추한 모습을 은퇴 후에 나타나지 않도록 경건의 연습에 힘써야 한다. 물론, 지금의 나의 모습에서는 그러한 면에는 전혀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러나 바울은 고전10:12에서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경고하지 않았는가? 인간은 연약한 존재이므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다. 그렇다. 과거 수습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시험에 빠진 교회들을 방문해 보면 정상적인 교인들이 많아 보이지 않는다. 눈동자와 표정이 일그러져 있고 조그마한 일에도 흥분하고 목청을 높인다.

특별히 평소에 인격적인 분으로 보았던 지도자들도 거칠게 흥분하는 모습으로 반대편을 공박하는 모습을 보게된다. 사탄의 덫에 걸리면 이런 꼴이 되고 마는 것 같다. 나인들 시험에 빠지면 별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교만은 금물이다. 교만한 자는 패망의 선봉이라고 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면서 자신을 쳐서 복종하기를 쉬지 않아야 한다. 원로목사가 존경을 잃게 되는 것은 ‘이 교회는 내가 젊음을 다 바쳐 성장시킨 교회이다.’라는 지나친 집착 때문이다. 집착의 뿌리는 욕심이다.

아니,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요, 하나님이 자라나게 하신 것이지(고전3:6), 어떻게 자기가 성장시켰다고 자랑할 수 있는가? 그 집착을 버리지 않는 한 결국 사탄의 미혹에 넘어가 교회를 어지럽히고 마는 것이다. 또 하나는 노여움이다. 노년이 깊어갈 수록 심령이 연약해지면서 노여움의 농도도 짙어가는 것을 주변 은퇴자들에게 발견하게 된다. 판단력이 흐려진다. 조그마한 말에도 쉽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게 된다. 사탄은 그런 약점을 이용하여 불평객들을 통해서 담임목사와 원로목사 사이를 오가면서 이간질하게 만든다.

가장 조심할 때가 담임목사가 부임한지 3년이 지난 다음이다. 처음 부임하여 3년은 허니문(honey-moon) 기간이다. 그 기간 동안은 웬만한 허물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3년이 지나면서 너무나 밀어붙이고 있는 담임목사의 목회방법에 대해 다소 지치는 느낌을 가지게 되고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그 때에 전임자의 여유 있던 목회 방법이 왜인지 그리워지게 되므로 담임목사 지도력에 누수현상이 나타나기가 쉬운 것이다. 그 때에 원로목사가 가장 조심할 때이다.

한해 두 해 지나면서 원로목사에 대한 교인들의 관심이 멀어지므로 섭섭한 마음을 품고 있던 차에 어느 누가 찾아와 담임목사의 목회방법에 대해 불만을 토할 때에 쉽게 빠져들기가 쉽다. 그 때에 단호한 태도로 담임목사를 옹호해 주어야 교회는 든든히 서가는 것이다. 때로 원로목사들의 모임에 가면 자기 교회 담임목사에 대한 노골적으로 불평하는 분들을 만나게 된다. 들어보면 너무나 하찮은 내용이다. ‘자기를 무시했다’라든지, ‘누가 주례를 부탁했는데 담임목사가 반대해서 못하게 되었다.’든지 하는 따위이다.

시무할 때는 상당히 대범하던 분이었는데 어떻게 저렇게 옹졸해 지고 있는가 싶은 안타까운 생각이 들게 된다. 지나친 집착이 쉽게 노여움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은퇴 초기부터 시무하던 교회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 뿐 아니라 교인들에게 너무 찾아오거나 전화하지 않도록 신신 당부하고 대신 담임목사 중심으로 교회발전에 힘쓰라고 누누이 강조했었다. 그리고 본교회 출석도 담임목사의 요청에 따라 전반기(어버이 주일), 후반기(교회창립주일)에 일 년에 두 번 설교하고, 그리고 특별한 행사 때 참석하는 정도이다.

그러므로 모처럼 만날 때는 서로가 반갑기 그지없는 마음이다. 다행히 은퇴 후에 여기저기 교회에서 설교하는 일과 대리당회장 역할을 하는 일로 바쁘게 보낼 수 있었다. 은퇴한 후에 나름대로 일거리나 취미거리를 만들어 병든 생각이 깃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 물속에서 구르는 돌은 이끼가 끼지 않는 법이다. 최근 은퇴한 어느 목사는 하루 시간보내기가 너무나 힘들다는 하소연하면서 담임목사 시절이 다시 그립다는 투로 말하는 것을 보며 가슴이 아팠던 기억이 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너무나 바쁘게 살고 있다.

인터넷 웹진 ‘소리’에 매주 글을 싣는 일과 다른 분들의 글들을 담아 편집하는 일만으로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다가 집사람이 신학대학에 일주일에 두 번 출석하기 때문에 아침저녁 운전기사 노릇도 하고 있다. 그리고 하고 싶은 취미거리 일들도 많다. 사실, 담임목사 시절 33년은 너무나 바쁘게 살았던 것 같다. 33년 동안 안식년 휴가를 누려본 적도 없는데다가 다른 목회자들은 하지도 않는 밤9시기도회를 만들어 25년 동안이나 계속했으니 밤에 시내에 나가서 음악회나 영화, 스포츠 관람들을 즐기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은퇴 후에 주어진 이 엄청난 자유로운 시간들은 ‘꿀맛 같은 시간’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고 성경을 읽은 후에는 습관적으로 컴퓨터 앞에 앉아서 화면으로 모든 일간지들의 중요 뉴스나 사설을 읽는다. 또한 컴퓨터 안에 내재된 전자책을 통해서 좋은 작품들을 읽기도 하고 ‘위디스크(wedisk)’같은 사이트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영화를 ‘유에스비(usb)’에 다운받아 보기도 한다. 은퇴 후에 큰마음 먹고 마련한 50인치 텔레비전에 5.1채널의 음향시설을 접속하여 영화를 보면 영화관에서 보는 것만 못해도 어느 정도 만족감을 줄 정도로 재미가 쏠쏠하다.

그리고 틈만 나면 바둑 사이트에 들어가서 고수들의 바둑을 관전하기도 하고 한 밤중에 깨어서 영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박지성의 축구를 보는 재미도 은퇴한 후에 만나는 쏠쏠한 재미이다. 앞으로 더 욕심을 부린다면 사진기 가방을 메고 산과 들, 바다를 찾아가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다. 그러므로 시간을 보내기가 너무 어렵다는 어느 은퇴자의 호소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 은퇴하는 분들은 은퇴 후에 건전한 시간소일을 위한 일거리나 취미거리를 준비해야 한다. 그것이 자신과 가족, 교회와 담임목사에게 누(累)가 되지 않는 길이 아닐까 싶다.

/홍익교회 원로목사, 본보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