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는 영국이나 일본처럼 저열한 친미주의를 선호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를 거역하지는 않았다. 이라크 파병에 동참한 것이 그 예이다. 그런 그가 퇴임 후에 재임시절의 회고를 책으로 엮었다. 여러 내용 중 눈길이 가는 부분이 있다. 이 부분이다.“나는 부시 미국 대통령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는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데 종교를 끌어들인다. 그는 회담 도중 여러 차례 반복해서 스스로를 신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묘사한다.” 다시 말하면 이런 것이다. ‘자신의 정치적 노선과 판단이 신의 결정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모든 일을 하나님께 상의하는 자세는 신앙인에게는 절대선과 같은 태도이다. 그런 의미에서 부시는 정말 훌륭한 ‘신앙인’이다. 그 예가 몇 가지 있다. 2000년 공화당 대선후보 TV토론에서 사회자가 “정치철학에 영향을 미친 인물이 누구냐”고 묻자 부시는 주저 없이 “예수”라고 밝혔다고 한다. 별 일 아니면 아침마다 백악관 기도모임이 참석하고, 각료회의는 기도로 시작하고, 여력이 되는대로 성경공부도 한다.

훌륭한 신앙인 부시-라이스

이라크 전쟁 결정 과정도 화제 거리이다. 2001년 9월 11일 뉴욕 세계무역센터가 테러로 파괴되자, 부시는 측근들을 캠프 데이비드 별장에 불렀다. 자욱한 담배연기와 심각하고 메마른 어휘들이 오갈 것 같지만, 당시 상황을 전하는 외신들은 ‘이날 분위기는 일반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셀 조장 모임 같았다’고 전했다. 모임은 법무부장관의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찬송가 연주로 시작했는데, 콘돌로자 라이스 현 국무장관(당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한 손을 들고 눈물 흘리며 찬양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무엇이 논의됐는 줄 아나. ‘이라크를 박살내자’는 침공이었다고 한다. 부시 대통령은 훗날 한 인터뷰에서 이라크 침공 결정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협의한 것’이라고 밝혔다. 10만 명의 인명을 죽였고, 그 인명을 죽이기 위해 1조 달러가 들어간 전쟁. 그 흉악하고 잔혹 무도한 전쟁을 감행한 배후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셨다는 주장이다.

여기서 라이스 이야기로 논의를 좁혀보자. 미국의 한 장로교 목사의 딸로 태어난 라이스는 여태 미혼이다. 그녀의 신앙의 높은 경지는, 결혼할 뜻이 없다는 점을 ‘하나님과 결혼했다’는 말로 표현하는 부분에서도 읽을 수 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기도로 시작하고, 피아노를 이용해 찬양곡을 연주하는 것을 취미로 여긴다고 하니 그녀의 신앙은 평균치를 뛰어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그녀는 이라크 전쟁을 주도한 미국 신보수주의자(네오콘이라고도 부른다)의 핵심적인 간판 역할을 하고 있고, 한 때 북한에 대해 무력 제재를 언급할 정도이며 이에 소극적인 한국과 중국 정부를 상대로 좋은 말로 압박, 심한 말로 공갈을 퍼붓기도 했다.

잔인한 침략자 부시-라이스

고지론이라는 말이 있다. 1990년대 초 현재 덕망 높은 지도자로 평가받는 한 목회자가 제기한 이론이다. "전쟁에서 고지를 점령하면 최소 3배에서 5배의 전략적 우위를 점하게 됩니다. 이 땅에 그리스도인들이 많지만 세상 속에서 그 영향력을 제대로 발휘하고 있지 못한 이유는 바로 고지를 점령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중략) 예수님이 낮아지라고 하신 것은 실력이 아니라 자세입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낮아지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실력을 높이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인간적인 야망을 위하여 고지를 정복하려고 힘쓰지만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기 위하여 각자의 고지를 정복하려고 힘써야 합니다." 그렇다면 부시나 라이스는 가장 훌륭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세계 최강국의 대통령이요, 그 최강국 대통령의 외교정책을 총괄하는 부서의 대표에 오른 사람들 아닌가. 고지론에 의하면 그들은 세상적인 야망을 거부하고 하나님 나라 건설에 매진해야 할 텐데 과연 그러했을까.

한국은 어떤가. 하향세라고는 해도 우리나라에는 870만 명을 기반으로 한 기독교세가 있다. 수도 서울에서 180도 눈 돌려 교회가 안 보이는 곳이 없다. 그 어떤 정변과 세대교체 열풍이 일어나도 우리나라 국회의원의 1/3 이상은 항상 기독교인의 몫이다. 적어도 한국과 미국에서 기독교인들이 높은 자리에 못 올라서 세속적 권력의 힘이 없지는 않은 셈이다.

그러나 그 두 나라의 열성적인 기독교인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각은 온정적이지 않다. 이유는 이렇다. ‘종교답지 못하다’는 것이다. 욕망을 추구하기가 세속의 그 어떤 집단보다 덜하지 않은데 거기에 독선적이기까지 하니 이제는 ‘비판’ 정도가 아니라 ‘혐오’를 받는 대상이 됐다.

빈곤한 철학, 고지론의 함정 빠지기 쉬워

젊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비전’이라는 말이 이제는 관용어가 되다시피 했다. 너무 많이 쓰이기 때문이다. 그 ‘비전’의 종착지로 어떤 이들은 정치인의 자리를, 다른 이들은 CEO석을, 또 몇몇 이들은 문화예술

▲ 김용민 <소리> 칼럼니스트. 한양대(안산) 겸임교수이며 KBS, SBS, CBS라디오 등에서 시사평론을 담당하고 있음.

계 종사자로서 대중의 환호를 받는 무대를 꿈꾼다. 그 꿈을 품은 이들은 세속적 권력과 재물, 영예를 노리고 있다. 높은 자리에 앉아야 하고, 어마어마한 이문를 거둬야 하며, 대중들의 뜨거운 사랑을 희구한다. 고지론은 그 지향점과 결과물 모두가 성공이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부추긴다.

그러나 ‘세속적 성공’에 대한 방법상의 고민만 할 뿐, 어떤 윤리의식과 시대정신 또 소명감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인지에 대한 자기 설계 및 무장이 부족하다면 큰일이다. 이런 ‘준비되지 않은 비전의 사람’이 ‘고지’를 점령하면 되면 결과는 뻔하다. 이런 이들이 어느 자리에 가서 신앙 이야기하면 할수록 기독교는 욕을 먹게 돼 있다.

우리가 오를 고지는 어디인가. 세속 세계가 이야기하는 정상(頂上)의 터인가. 아니면 세속 세계와는 무관하게 하나님의 기쁨을 얻는 길인가. 목표는 많으나 목적이 선명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맛 잃은 소금’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고지론은 위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