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가 과로로 쓰러졌다. 역대 일본 총리들은 예외 없이 격무와 과로를 호소해 왔다고 한다. 무라야마 전 총리도 병원에 갈 틈이 없어 집무실에서 링거주사를 맞으면서 일했다는 것이다. 분 단위로 짜인 일정을 보면서 총리의 업무강도가 매우 높다고들 한다. 일본 총리의 이러한 업무강도에 대해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다. 총리가 직접 몸으로 땀을 흘리면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은 국민들을 안심시키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클린턴 전임 대통령의 일하는 모습을 보면, 일본 총리 와 전혀 다르다. 일하기 위해 휴가를 보내는지 아니면 휴가를 보내기 위해 일하는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다. 블레어 영국 총리의 경우도 부인의 출산을 위해 2주일 정도의 휴기를 보냈다는 보도는 우리에게는 참으로 신선하게 들린다. 사실 중요하고 어려운 의사 결정을 내리는 사람일수록 맑은 심신을 유지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적당한 휴식이 절대 필요하다.

미국이 10년 가까이 경제호황을 누렸던 것은 레이건 정권 때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산업의 구조조정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라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그 혼란의 와중에서도 레이건은 격무에 시달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통령직을 즐겼다. 이처럼 직무수행 방식에서 서구와 일본의 권력자들이 극명하게 대조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의사결정 방식의 차이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서구인들은 문제의 해결을 위해 전략적으로 접근하지만, 일본인들에게는 전략(戰略)이란 개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전략이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하면, 선택(選擇)과 집중(集中) 이다. 최고경영자가 자신의 조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전부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중요하고 어려운 일에 대해서만 직접 간여하고 나머지는 부하들에게 위임하여 처리하는 것이다. 관리자는 중요하고 어려운 일이 무엇인지를 가려내어 그 사안에 대해 자신의 역량을 집중함으로써 조직 전체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사회에서는 중요한 일이건 아니건 간에 모든 일을 아랫사람이 검토하여 윗사람에게 물어보는 다단계 결재방식으로 처리한다. 즉 , 선택과 집중이라는 전략적 개념이 의사결정과정에 거의 개입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두 가지 상반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윗사람이 모든 사안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과도한 업무량에 시달리거나, 아니면 모든 사안을 아랫사람에 의지해서 결정하기 때문에 권한은 윗사람이 갖고 책임은 부하에게 떠넘기는 현상이 나타난다.

전자가 오부치 총리 스타일이라면 후자는 김영삼 대통령 스타일이다. 조직의 효율성을 위해서는 둘 다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직위의 높낮이에 걸 맞는 직무를 배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관료조직에서는 직무배분 구조를 정교하게 제도화함으로써 관료들이 자신의 직무를 주도적이고 창의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물론 이때 중요한 것은 직무분석을 통한 각 직무의 성과책임을 명확히 규명하는 것이다.

아울러 업무의 경중을 판별할 수 있는 전략적 사고(strategic thinking)를 갖는 것이야말로 최고경영자에게 요구되는 중요한 덕목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관료들은 이러한 덕목을 기르는 것이 쉽지 않다. 다단계 결재방식으로 인해 윗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능한 권위주의자로 변해가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의 눈치를 살피면서 자신의 결정권한을 위로 떠넘기는 무책임한 사람이 되어 가기 때문이다.

/ 경영학 박사, 서강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