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수학능력시험 SAT 문제 유출 사건이 잇따라 불거져 파문이 일고 있다. 국내 어학원 강사가 태국까지 가서 문제를 빼돌리고, 이걸 미국에 있는 한국 유학생들에게 넘긴 것이다. 이게 태국에서만 벌어진 일이 아니다. 이번엔 국내에서 시험지를 오리거나 계산기에 문제를 입력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유출했다가 적발됐다. 결국 SAT 시행사인 미국 교육평가원이 한국에서 진상조사를 벌인다고 한다. 나라 망신이 아닐 수 없다. 이러다 대한민국이 커닝의 왕국이란 오명을 얻을까 우려된다.

‘커닝’은 영어이다. 사실 미국도 커닝이 없다는 거짓말이겠지? 커닝은 동서고금을 망라한다. 물론 미국에서는 ‘커닝’이라는 말은 안 쓴다. 커닝(cunning)은 대표적인 콩글리시다. 물론 본뜻인 ‘교활한’이 커닝의 속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어색한 편은 아니다. 제대로 된 영어는 ‘속이기’라는 뜻의 치팅(cheating)이다. 그럼 어디서 온 말일까? 일어 사전에 ‘칸닝구’가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메이든 인 저팬’같다.

옛날에는 뒤에서 보기, 쪽지 던지기, 초치기 같은 수법이 많이 쓰였는데, 요즘은 달라졌다. 한 방송인은 무감독 시험 전통으로 유명한 학교를 나왔다. 성적이 상위권인 이 방송인은 하위권을 맴도는 동기에게 답을 보여줬다고 한다. 쪽지에 적어 던지면 이걸 받아서 보고 적는 형식이다. 그런데 같은 교실 안에서 시험을 본 후배 한 명이 학생부에 신고했다. 그래서 보여준 사람은 그 과목 0점 처리, 베낀 사람은 전 과목 0점 처리로 됐다고 한다. 문제는 보여준 사람의 성적이 크게 떨어진 반면, 베낀 사람의 경우 전 과목 평균 0점인데도, 등수는 그대로였다는 점이다.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었던 것이다.

요즘 커닝 방법은 너무 놀라워서 기성세대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이젠 투명한 OHP 필름이나 고해상도 축소복사기를 이용한 커닝 페이퍼는 고전적 수법이다. 휴대전화나 PDA 같은 IT 시대 휴대용품이 이용되기도 한다. 먼저 나간 학생이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나 채팅을 통해 정답을 알려주는 수법이다. 예전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에 무선호출기가 나왔는데, 공교롭게도 그게 11자리였다. 그래서 객관식만 출제되는 시험이 총 33문제였는데, 답을 미리 쓰고 나간 동기가 세 번에 걸쳐서 답을 전송해 주는 방식으로 커닝이 이용됐다. 물론 내가 그랬다는 게 아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전자기기를 갖고 시험장에 못 들어가게 하는 학교가 많다. 수능에서는 당연히 작년부터 엄하게 금하고 있고.

시험 중 부정행위, 과거(過去), 과거(科擧)에서는 어땠을까. 조선시대에 가장 흔했던 유형은 다른 사람의 답을 훔쳐보는 것이었다. 이것도 이름이 있다. 고반(顧盼)이라고. 작은 책이나 종이를 붓대 속에 숨겼다가 꺼내 보는 협서(挾書)도 있다. 요즘엔 붓대 대신 볼펜이 쓰이고 있지만. 한편 때론 답안지를 일부러 떨어뜨려 보여주는 낙지(落紙)도 있다. 쪽지 던지기가 그 예가 되겠다. 시험지를 바꿔 내는 환권(換券)도 있었다. 어째 요즘 쓰이는 수법 그대로이다. 한편 성균관에서 새끼줄이 들어 있는 대나무 통이 발견된 일이 있었다. 춘천교대 심우엽 교수는 외부에서 쓴 답안지를 시험장 안으로 들여보내기 위한 커닝 도구로 해석했다.

갑자기 실학자 연암 박지원 선생이 생각난다. 박지원 선생 같은 사람은 답안지를 백지로 내거나 답안지에 글씨 대신 엉뚱한 그림을 그려놓고 나왔다고 한다. 과거에 급제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소신에 목숨을 건 조선의 아웃사이더’의 저자 노대환 씨의 글을 보면, 박지원 선생의 절친한 친구로 이희천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명기집략’이라는, 요즘으로 말하자면 ‘빨간 책’을 들고 다니다가 영조에게 발각돼 결국 죽임을 당했다. 이 꼴을 보느니 조정 진출은 안 한다고 마음먹었다. 과거 시험에 백지를 적는 일, 이런 이유이다.

커닝, 사법 처리가 가능할까. 서울중앙지검이 몇 년 전에 커닝행위로 적발된 학생에 대해 약식 기소한 일이 있었다. 대학생 7명이었는데. 벌금 100만에서 150만 원이었다. 대학생도 이러한데 사법연수원생 또 사법시험 응시생이 이러면 더 안 되겠지? 예비법조인인 사법연수원생이 커닝을 하다 들켜 ‘정직 3개월’ 처분을 받은 일도 있었다. 사법시험 응시생이 이른바 '커닝 페이퍼'를 몰래 훔쳐보다 적발돼 향후 5년간 모든 공무원 시험을 볼 수 없게 됐다.

정치인 중에는 커닝하다가 낭패 본 분도 있다. 그 때 크게 반성했다고 밝힌 분이라 소개한다. 정몽준 한나라당 대표 이야기이다. 서울대에 다닐 대 그때 커닝하다가 전 과목 수강취소라는 중징계를 받았다고 한다. 그래도 전 과목 수강취소는 좀 심하지 않았을까? 단순히 커닝하다 적발되면 해당 과목만 낙제점을 받는 게 보통인데 말이다.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기준은 너무 관대하다. 실제 몇 해 전에 발표된 국내 석사 논문에 따르면, 대학생의 절반 이상이 커닝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부정행위를 많이 경험할수록 다른 사람의 부정에 대해서도 용인하는 정도가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목적을 위해서는 과정 따위야 소용없다는 의식, 이것부터 고쳐야 할 것 같다. 커닝은 정의에 대한 믿음과 기대를 허물어뜨리는, 말 그대로 ‘교활한’ 부정행위다. 문제는 ‘승자의 정의’라는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커닝과 같은 불법과 반칙을 조장하고 묵인해온 사회 세태다. 목적만 달성하면 그것이 곧 ‘정의’로 간주되는 것이 권력의 세계다. SAT 부정은 더 심각하다. 내 자식의 점수만 높일 수 있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일부 학부모의 비뚤어진 교육열과 돈에 눈이 먼 몇몇 학원의 행태가 빚은 합작품이다. 우리 사회의 건강성,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 아닐 때, 비로소 서광이 비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