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는 외국에서 들어온 것이 맞다. 하지만 고추장만은 세계 어느 누구에게도 종주국이라는 권위와 명성을 내줄 수 없다는 게 우리 국민의 정서이다. 그래서일까. 고추장에 관한한 우리가 만든 기준과 질서는 곧 세계의 법칙이었다. 이런 점을 토대로 고추장 국제 표준화 작업이 그동안 진행돼 왔다. 한 1년여 정도 진행돼 왔는데. 끝내 무산됐다.

한식의 세계화는 국가 경쟁력 강화 전략의 핵심인데. 무슨 일이 있었을까. 식품업계의 사소한 자존심 싸움 때문이다. 고추장 국제 표준화 작업에 대해 우선 설명을 드려야 할 것 같다. 이건 한마디로 얘기해서 ‘매운 맛’의 등급을 매기는 일이다. 한국식품연구원이 주관했는데. 1위와 2위 업체인 CJ제일제당과 대상이 참여했다. 이 두 업체는 “표준을 만들자” 이렇게 합의해 놓고, 1년 동안 연구 또 논의해왔는데 합의에 실패했다.

매운맛을 내는 물질이 ‘캅사이신’(Capsaicin)이지? CJ제일제당은 이걸 계측할 때, 스코빌 단위를 사용하자고 주장했고, 대상은 대상은 PPM 즉 생화학적 산소요구량 단위로 하자고 주장했다. 또한 영문 표기 방식도 ‘보통 매운맛’의 경우 CJ제일제당은 ‘Medium hot’으로 하자는 입장이지만 대상은 ‘moderate’로 표기하자고 맞섰다. 1년 동안 이거 갖고 옥신각신했다는 건데. 각자 다 자기주장이 옳다며 맞섰다는 것이다.

CJ제일제당은 스코빌 단위야 말로 전 세계적으로 매운맛 등급을 표기할 때 쓰이는 표준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대상은 국제식품규격위원회에 고추장을 등재할 때 캅사이신 함량을 PPM으로 기록했기 때문에 PPM이 기준이 된다고 주장했다. 표준화가 무산되면서 CJ제일제당과 대상은 저마다 독자적인 5단계 매운 맛 등급을 표기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면 소비자들은 기준이 도대체 무엇이냐 이러면서 혼란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고추장 얘기가 나와서 그런데 불경기 때는 칼칼하게 매운 음식이 잘 팔린다고 하지? 요즘 TV마다 매운 음식이 자주 소개되는 것을 보면 정말 불경기는 불경기인가 보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즐겨 먹는 고추장이 암 예방은 물론 다이어트에도 좋다는 연구결과가 나왔었다. 부산대 식품영양학과 박건영 교수의 연구 결과인데. 고춧가루 그 자체보다 고추장이 더 효험이 있다는 분석이었다.

지역마다 고추장 만드는 법이 다 다르다. 충청도 지방에서 주로 먹던 보리고추장은 엿기름을 안 쓴다. 유명한 순창고추장은 콩을 덜 쓰고 여름에 메주를 쒀 겨울에 담그는 게 특징이다. 집집마다 직접 담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거의 사먹는다. 그래서 고추장 맛이 전국적으로 통일되고 있는 양상이다. 국내에 고추장 된장 쌈장까지. 장류 시장은 5400억 정도인데, 이 가운데 고추장은 2200억이라고 한다. 그러다보니 업계끼리 양보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해외에 나갈 때 고추장을 가방에 넣고 가는 일이 참 많다. 해외에도 고추가 있을 텐데. 해외에서 생활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본국에서 고춧가루를 공수해 먹은 경험이 있음직하다. 다른 식재료들은 조금씩 성질이 달라도 현지에서 어떻게든 조달해볼 텐데 고춧가루는 한국산이 아니면 김치든 찌개든 맛이 잘 안 난다. 이상하지? 고추는 말씀하신대로 외래종인데.

원산지가 아메리카 대륙이다. 그렇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뒤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거쳐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는 데 대체로 이론이 없다. 문제는 동아시아 전파 경로이다. 유럽을 거쳐 일본에 도착한 고추가 임진왜란 때 왜병을 통해 들어왔다는 것이 지금까지 통설이다. 반대로 중국으로부터 들어왔다거나 임란 이전에 들어왔다는 소수설도 간간이 제기돼 왔다. 고추가 조선 초에도 식용으로 쓰였다는 한국식품연구원의 연구 결과가 그렇다.

그러고 보면, 외래종이지만 이걸 제대로 토착화한 민족은 우리밖에 없는 것 같다. 고추는 전 세계적으로 더위를 이겨내거나 추운지방에서는 반대로 보온을 목적으로 애용되는 식품이다. 그렇지만 우리나라만큼 고추를 이용한 음식문화가 발달한 나라도 없다. 귤이 회수를 넘으면 탱자가 된다고 하지만, 우리 조상은 고추를 우리 것으로 완전히 소화해 김치와 고추장이라는 훌륭한 음식문화로 승화시켰다. 그뿐 아니라 각종 요리의 기본양념으로 삼은 지 오래다. 종자는 끊임없는 개량을 통해 현재 100여종에 이른다. 국내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는 채소는 배추도 무도 아닌 고추라고 한다.

고추를 가까이해서일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화끈한 걸 좋아하지? 매운 고추 같은 치열함과 투쟁적 의지가 없었다면 지금의 번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런 화끈한 마음으로 두 회사가 지금이라도 협의점을 모색하면 어떨까. 고추장의 표준화를 통해 고추장 종주국으로서의 위상은 더욱 확고해지고, 또한 한식의 세계화를 통해서 한국음식의 경쟁력을 세계에 입증하는 길, 못 할 거 뭐 있나. 같이 매운 낙지볶음 드시면서 대타협하시길 조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