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운드 또는 링에서 내려오지 못한 비운의 플레이어들’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왜 이 이야기를 하려는지 잘 아실 거다. 2000년 4월 18일. 롯데 자이언츠와 LG 트윈스의 프로야구 경기가 열리고 있던 서울 잠실구장. 2회 초 주자 1, 2루 상황. 2루에 나가 있던 롯데의 임수혁이 갑자기 쓰러졌다. 마치 느린 화면을 보는 것 같았다. 모두가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1루에 있던 롯데의 용병 테드 우드가 깜짝 놀라 뛰어갔고, 이어서 더그아웃에 있던 트레이너가 뛰어 나갔다. 임수혁은 의식을 잃은 채 다리를 떨고 있었다. 임수혁를 둘러싼 사람들은 그러나 허리띠를 풀어주고 들것에 실어 옮기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해 주질 못했다.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10년 간. 그는 식물인간 상태였다.

'돌아오지 않는 2루 주자' '비운의 거인' 당사자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을 별명, 무수히 양산했다. 쓰러지기 불과 몇 개월 전 플레이오프 최종전에서 기적과 같은 9회 대타 동점 홈런을 날리며 대역전극을 만들어낸 임수혁 선수였다. 누군가 갑자기 사고로 숨져도 남은 이들의 허망함은 크지만, 오랜 시간 실낱같은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은 이들은 더욱 견디기 힘든 절망감에 사로잡히지 않았을까.

비운의 챔피언 최요삼 선수 얘기도 안 할 수 없다. 얼마 전 한 방송사 예능 프로그램에서 최요삼 선수의 이름이 거론되기도 했지? 눈물 흘리던 출연자도 있었는데. 한 때 WBC챔피언으로 4차 방어전까지 치렀던 최요삼 선수.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서른 다섯 나이에 링에 올라섰다. 2007년으로 기억된다. 크리스마스 날 열린 WBO 인터콘티넨탈 플라이급 첫 방어전. 시종 우세한 경기를 펼쳤지만, 최요삼 선수, 마지막 10여 초를 남기고 쓰러졌다. 하지만 시종 우세한 경기를 했기 때문에, 다시 일어났을 때엔 승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들춰진 일기장에는 "이제는 끝내고 싶다. 권투를…, 맞는 게 두렵다"라는 고독감과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솜으로 쿠션을 넣어 만든 글러브지만, 맞은 사람은 엄청난 충격을 이야기한다. “스피드와 파워로 단련된 복서의 정확한 펀치는 도로를 주행하는 750㎏에서 1톤의 승용차가 쳐 받는 것과 같다. 이런 힘이 2~3회 모이면 거대한 몸집의 미식축구 선수가 전속력으로 달릴 때의 파워와 비슷하고, 이런 펀치를 세 번에서 네 번 맞으면 그 충격은 맨땅에 철제 빔을 박는 강철 해머를 1m정도 휘둘렀을 때와 다르지 않다”라는 설명도 있다. 그만큼 위험한 경기다. 그럼에도 최요삼 선수는 권투 중흥을 위해 다시 링에 섰다. 링에 선 목적은 또 있었다. 어려운 사람을 도우려는 것이었다. 최요삼 선수는 장기기증과 신체이식으로 6명의 생명을 구하고 세상을 떠났다.

비운의 복서하면 김득구 선수도 빼놓을 수 없다. 1982년이었지? 강원도 횡성에서 가난한 5형제의 막내로 태어나 갖은 고생 끝에 복서가 됐고, 링에서 지긋지긋한 가난을 떨쳐내려 했던 사람, 김득구. 11월 14일 김득구는 WBC 라이트급 타이틀을 놓고 챔피언 레이 맨시니와 맞붙었다. 도전자의 초반 KO패라는 전문가들의 예상을 비웃듯 김득구는 맨시니를 거세게 밀어붙였다. 챔피언 벨트가 손에 잡히는 듯했다. 하지만 운명의 14회. 맨시니의 오른손 스트레이트가 김득구의 턱에 꽂혔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다운된 김득구는 힘겹게 일어났으나 다시 쓰러졌다. "링 위에서 죽겠다"고 한 각오가 현실이 될 줄은 몰랐다. 세상을 떠난 것이다. 어머니는 이 충격에 3개월 후 스스로 목숨을 끊어 아들을 뒤 따랐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선수들의 투혼도 투혼이지만, 죽음만은 피할 수 없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2002년 속초에서 열린 대학 축구연맹전. 당시 숭실대의 21살 김도연 선수가 공중 볼을 다투다 그만 쓰러지는 일이 발생했다. 김도연 선수는 병원으로 후송하는 과정에서 숨졌다. 시합을 하다가 선수가 쓰러지면 신속하게 앰뷸런스에 실어서 병원으로 데려가야 하는데. 그 날 김도연 군을 위한 앰뷸런스는 없었다. 시합 전 한 간호사가 빈혈 증세를 보여서 그 간호사를 태우고 병원으로 갔다는 것이다.

임수혁 선수의 경우도 그랬다. 사고 후 5분이 가장 중요하다는데 그때까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앰뷸런스에 실려 가는 동안 임수혁의 맥박과 호흡이 정지됐다. 의료진이 인근 병원에 도착한 후 전기충격기로 심폐소생술을 시도해 맥박과 호흡을 살려놓기는 했지만 그동안 산소 공급이 중단돼 뇌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다.

지금은 좀 나아졌을까. 각 구단은 구급차와 응급 구조사를 배치하는 대비책을 마련했다. 하지만 여전히 의사가 대기하는 야구장은 광주 무등구장뿐이라고 한다. 선수들이 시속 150㎞의 공 앞에 노출되고 격하게 충돌하는가 하면 수만 명의 관중들이 서너 시간 흥분을 주체 못하는 운동장에 단 한 명의 의사도 없는 것이다. 비단 야구뿐일까. 경기장이 인간승리의 장이 되어야지 비극의 장이 돼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