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7일에 5일장(場)이 선다는 정선, 그리고 평창을 다녀왔다.

강원도가 고향이면서도, 그리고 문학수업을 했다는 입장에서 소설가 이효석의 고향인 평창과 민족의 한이 배어 있다는 정선을 그 동안 가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언제나 의식 밑에 깔려 있었다. 그리고 막연히 평창으로 넘어가는 길고 긴 고갯길 옆에는, 들꽃처럼 메밀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을 것이요, 달이 뜨는 밤에는 이효석의 표현대로 소금으로 뿌린 듯 한 정경(情景)일 것이라고 막연히 추측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교회 제2남선교회가 원주 간현 유원지에서 여름수련회를 개최하면서 특강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순서를 마친 후에, 일박을 예정으로 부부가 다녀오기로 계획을 세웠다. 간현에서 승용차로 떠난 때는 오후 1시 30분경이었다. 문막 IC에서 영동고속도로로 진입하여 한 30분을 달린 후에 새말 IC 에서 안흥 쪽으로 들어섰다. 온통 풍성한 숲과, 풍년을 예고하는 듯싶은 곧게 뻗고 있는 벼들과 옥수수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들판을 뚫고 국도(國道)를 운전한다는 것은 대단히 기분이 좋은 일이다.

▲ 강원도 정선의 가을 풍경 ⓒ 정선군청

무슨 설교나 강의, 혹은 무슨 회의 차 갈 때에는 긴장감 때문에 주변의 경관을 제대로 감상할 여유가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시간에 쫓기는 일이 없이, 한껏 주어진 자유감을 만끽하면서, 부부가 지나온 날들을 대화하면서, 강원도 특유의 경치를 감상하면서 드라이브한다는 것은 , 복잡한 도시의 삶에 쫓기면서 신경질적으로 변해버린 우리의 예민한 감정들을 얼마나 포근한 해방감으로 풀어지게 만들고 있는가? 그러한 때에 어울리는 유행가라도 목청껏 불렀으면 그 흔쾌함은 대단했을 것이다.

그리고 종종 지도를 보면서 찾아가는 생경한 길들, 그리고 이름으로만 듣던 작은 읍들을 지나치면서 만나는 면사무소나 초등학교, 혹은 파출소나 농협의 창고들, 그리고 낡은 간판들은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이야기할 수 있도록 충분하게 제공하고 있지 않은가? 안흥을 지나면서 어떻게 그 유명한 찐빵을 맛보지 않을 수 있으랴? 따끈따끈한 찐빵의 특유의 맛을 즐긴 후에 다시 꼬불거리는 길들과 언덕들을 넘어서 달리다 보니 어느 새 평창이었다, 평창강은 맑기로 이름 나 있다. 강 옆에 주차한 후에, 강물에 맨발로 디디고 서서 그 맑음을 한껏 가슴에 담고 싶었다.

그러나 2일과 7일에 선다는 정선의 5일장이 파장(罷場)되기 전에 도착해야 한다는 생각에 속도를 늦출 수가 없었다. 드디어 꼬불꼬불하기로 유명한 정선 고갯길이 시작되었다. 유홍준 씨가 저술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2권에는 이 고갯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평창에서 정선으로 들어가자면 속칭 '비행기재'를 넘어야 하는데, 그 고장 사람들 말로는 시외버스를 탈 때 생명보험 들어놓아야 한다는 농담이 생길 정도로 험한 고개다. 벼랑을 타고 오르는 버스 안에서 저 아래쪽을 내려다보면 그 아찔함에 현기증을 느끼지 않을 장사가 없다. 특히 운전석 쪽 창가에 앉아 있는 사람은 마치 허공에 떠서 가고 있다는 착각이 들기 때문에 비행기재라는 별명이 공연히 생긴 것이 아님을 절감하게 된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넓게 만든 도로에 포장이 잘 되어서 오히려 그 지역은 절경(絶景)이라는 감탄이 나올 뿐이다. 과연, 정선은 절벽으로 이루어진 높은 산 안에 강을 끼고 이루어진 소도시였다. 두메 벽지(僻地)란 말에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이 바로 정선이었다. 정선에 도착한 때는 3시 30분경이었는데, 아직도 장이 서고 있었다. 시장 특유의 활기참은 조금 가시고 있었으나 흥겨움의 맛은 여전히 여기저기에 배어 있었다. 우리 부부는 길에나 좌판에 벌려 놓은 온갖 농산물, 생필품, 음식물, 한약재, 골동품들을 보면서 즐거움을 느꼈고 여름성경학교에 쓸 메밀가루들과 몇 가지를 산후에 음식 좌판에 앉아서 메밀 부침개와 점병 등을 사먹었다. 요기가 되고도 충분했다.

그리고 군청 예술회관에서 무료로 보여주는 '정선 아리랑 극'을 관람했다. 한말(韓末) 시대와 일제시대, 해방과 육이오 사변 등을 거쳐 오면서 만난 민족의 아픔을 정선 아리랑을 통해서 극화(劇化)한 내용이었다. 한 시간 반 동안 얼마나 많이 '정선 아리랑'을 들었는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도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온다'로 시작 되는 가사와 곡이 계속 입에서 흘러나올 정도였다. 그러면서 저 깊은 속으로 부터 민족의 한이 조금이나마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마, 남북문제가 점점 엉키어만 가는 상태에서 국내 어느 분야도 시원한 곳이 없기 때문에 그 곡이 더 절절이 아픔으로 다가오는지 모르겠다.

원래는 정선에서 일박하면서 '아우라지강'과 사북 탄광을 보고 갈 예정이었으나, 우리 부부는 그렇게 한가롭지 못했다. 목회 일에 늘 쫓기면 살아온 것이 몸에 밴 것인지 모른다. 다시 승용차를 몰고 '이효석 생가(生家)'를 찾아서 비행기재를 넘어서 방림을 거쳐 봉평으로 향했다.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소설을 읽으면서 막연히 생각했던 것은 봉평 고갯길을 넘어서면 평창일 것이라는 생각은 너무 터무니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강원도 평창의 봄 풍경 ⓒ 강원도 평창군 발행 '해피매거진'

평창과 봉평은 아주 동떨어진 곳이었다. 평창에서 한 시간 정도 달려서 영동고속도로 밑을 지나서야 봉평읍이 나타났다. 정선과 달리 야트막한 산들에 싸여 있는 곳으로 한국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소읍(小邑)이었다. 이효석 생가를 가기 전에 아름다운 비석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유명한 명귀(名句)들이 새겨 있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일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사귀가 한층 달에 무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그 소읍 외곽지역에 '이효석 생가'가 있었는데, 양철로 지붕을 이은 낡은 한옥이었다. 열심히 달려오면서 기대했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초라함이 쓸쓸함을 더해 주고 있었다. 그런 반면 이효석이라는 상품을 빌미로 해서 그 주변에 많은 화려한 음식점과 기념품 가게들이 난립하고 있었다. 외국에 유명 인물들의 사적관(史蹟館)들을 본 적인 있던 우리 부부에게는 그저 쓴웃음만 나올 뿐이다. 이는 상술에도 능하지 못한 태도이다. 그들이 우선 사적관을 잘 만드는 데 많은 돈을 투자한다면, 소문을 듣고 얼마나 많은 관광객들 몰려오겠으며 그러면 저절로 자기들의 가계도 번창하지 않겠는가?

이미 날이 어둑해 짐으로 봉평에 있는 다른 볼거리, 봉산서재(蓬山書齋)와 판관대(判官垈), 그리고 팔석정(八石亭) 중, 조선시대 명필 봉래 양사언이 강릉부사로 부임하는 길에 들려 이곳 천변의 풍경이 좋아 8일간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한 팔석정을 잠깐 돌아본 후, 다시 고속도로를 통해 횡성에서 하룻밤을 묵는 것으로 정선과 평창 여행 일정을 마감했다. 그 날 밤, 숙소밖에 엄청난 양의 폭우가 쏟아지는 소리를 들으며 여독(旅毒)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 본보 발행인, 홍익교회 원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