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명문가‘ 이야기 준비했다. 최근 실시된 필리핀 대통령 선거에서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 아들인 베니그노 노이노이 아키노 상원의원이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됐다. 세계 최초로 모자(母子) 대통령이 탄생한 것이다. 필리핀에서 '아키노 가문'은 정치 명문가로 알려져있다. 따라서 이번 당선이 부모 후광 덕분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아들 아키노 이전에 어머니 아키노 이야기부터 해보자. '수줍고 작은 제비꽃'. 학창시절 동급생들은 늘 조용하고 말이 없는 어머니 아키노를 이렇게 불렀다. 아키노는 명문가의 딸로 태어나 촉망 받는 젊은 정치인의 아내가 되었지만 1남4녀를 낳아 기르는 평범한 주부 역할에 충실했다. 그런 그를 20여 년 장기 독재의 마르코스 정권이 어느 날 갑자기 역사의 무대 위로 호출했다. 구체적인 계기는 이렇다. 1983년 8월21일, 3년 간의 미국 망명 생활을 접고 귀국을 감행한 남편 베니그노 니노이 아키노가 마닐라 공항에서 독재정권의 비밀 요원에게 암살을 당한 것이다.

비운의 죽음에 당시, 필리핀 국민 전체가 애도의 뜻을 표했다. 장례식에는 200만 명의 애도 인파가 몰렸다. 그들은 노란 면 옷을 입고 거리의 나무 가지에 노란 리본을 달았다. 아내는 대규모 반 마르코스 운동으로 번진 노란 물결의 중심에 자신이 있었다. 아키노는 다양한 노선의 반 마르코스 정치세력을 하나로 결집시킬 수 있는 유일한 구심점이었다. 1986년 2월, 그는 야당연합의 단일 대선후보로 추대됐다. 그러나 실패했다.

부정선거 때문이었다. 선거 참관인들이 선거결과를 인정하지 않았고 미국 같은 국제사회도 마르코스 정부의 선거부정과 폭력을 강력하게 비난했다. 수백만 필리핀인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아키노는 비폭력 저항을 외쳤고 군부도 가세했다. 결국 마르코스 부부는 하와이로 망명을 떠났고, 아키노는 필리핀 최초 여성 대통령에 취임했다. 피플파워가 이룬 혁명 드라마였다.

어머니 아키노의 집권기, 그다지 후한 점수를 받지 못하는 것 같다. 아키노는 성공한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집권 6년 동안 7차례나 군부 쿠데타에 시달렸고 필리핀 사회의 구조적 한계에 부딪혀 개혁에 실패한 탓이다. 그러나 6년 단임제 실현 같은 민주주의 정착에 기여했다. 퇴임 후엔 해비타트 운동 등 봉사활동에 열심이었고, 현실정치에도 끊임 없이 자기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지난 해 8월 세상을 떠났다.

아들의 당선, 결국 그 동력은 어머니에 대한 국민의 그리움 아니었겠는가. 아키노 전 대통령 외동아들인 아키노 의원은 실제로 지난해 8월 이전까지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평범한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아키노 전 대통령이 숨지면서 추모열기를 타고 단기간에 유력한 대선후보로 급부상했다. 심지어 자유당 총재는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자신은 부통령 후보로 물러나면서 아들 아키노 의원을 대선후보로 영입했다. 그러나 정치인으로서 능력을 검증받은 바 없다. 그래서 무임승차란 말도 나온다.

어느 나라에서나 명문가 출신 정치인은 재력 조직 유명도에서 남보다 앞선 출발선에 서게 된다. 유권자의 심판을 거치기 때문에 다른 분야의 세습보다 여론의 시선이 덜 따갑다. 왕대밭에 왕대 난다는 속담도 있다. 그렇다고 가난한 집안 출신이라고 해서 낙담하거나 노여워할 필요는 없다. 한국은 계층 상승이 무척 활발한 나라이다. 세탁소집 딸이 국회의원 되고 자장면집 아들이 장관 되는 나라가 아닌가.

전 세계적으로 정치 명문가들은 꽤 많다. 미국 얘기해보자. 아일랜드계 술집 주인의 아들로 태어난 조지프 케네디는 맨손으로 미국의 로열 패밀리를 창건한 인물이다. 둘째아들이 미국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이고 직계에서 상원의원 3명, 하원의원 3명, 법무부장관이 배출됐다. 한편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손자이자 변호사인 제이슨 카터가 할아버지의 정치적 텃밭인 조지아주의 주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이런 가운데 미국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41대 조지 부시 대통령의 장남이다. 동생 젭 부시는 플로리다 주지사이다.

대를 이어 가업을 잇는 풍토가 강한 일본도 정치인 가문이 많다. 후쿠다 야스오 총리와 아베 신조ㆍ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 가문이 대표적이다. 대개 선거구를 아버지나 할아버지 등의 친족에게서 물려받아 출발부터 빵빵하게 정치 경력을 쌓는다. 이런 정치 세습은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귀족가문 봉건영주 전통에 뿌리가 있는 탓인지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진다.

우리나라에도 대를 이은 정치인들이 늘고 있다. 6선의 조순형 자유선진당 의원 가문이 원조격이다. 선친은 1960년 제4대 대선 때 유력한 야당 후보로 나섰다가 애석하게 도중에 타계한 조병옥 박사이고, 고 조윤형 전 국회부의장이 친형이다. 민주당의 정대철 상임고문, 한나라당의 유승민 이종구 정진석 의원, 정우택 충북도지사도 당대에 이름을 날린 정치인 집안 출신이다. 하지만 헌정사가 일천하고 격동의 시대를 거친 탓인지 우리사회는 이들 가문을 정치명문가로 칭하는 데 인색하다.

이유는 이렇다. 정치가 국민에 대한 봉사의 영역이라면 박수 받을 일이지. 그러나 봉사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득권의 중심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런 인식은 국민이 뭘 잘 몰라서 하게 된 오해가 아니라 정치인 스스로 부추긴 선입견이다. 제자리에 돌려놓을 때, 정치는 명예롭게 되고, 이 정치의 대물림은 더욱 촉진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에게도 모두가 인정하고 존경하는 정치 명문가가 생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