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 천국 유럽이 도마 위에 올랐다. 그동안 '요람에서 무덤까지'으로 상징된 유럽식 복지국가 모델이 재정위기를 계기로 휘청거리고 있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 보도 내용이 그런데. 2차대전 이후 유럽에 좌파 정부가 잇달아 들어서면서 속속 도입됐던 복지 정책들은 탄탄한 경제력 덕분에 각국의 모델이 됐다. 하지만 사회가 갈수록 고령화되고, 이로써 생산층의 비율은 크게 축소되고, 이로써 세금수입이 줄고 더불어 지출은 늘어나 버린다. 당연히 국가 재정이 흔들리고 복지정책 자체도 위협받고 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유럽의 65세 이상 인구비율은 2050년까지 2배 가까이 크게 늘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바뀌느냐. 1950년대에는 경제활동인구 7명이 노인 1명을 부양했지만 2050년이 되면 1.3명이 1명을 부양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이러다보니 생산해서 세금 내는 인구와, 은퇴한 뒤라 연금 수입만 있는 인구가 비슷해지는 것이다. 그 나라 어떻게 되겠나.

유럽 복지모델은 실은 미국식 복지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공산주의 몰락 이후 미국을 구심점으로 해서 시장경제 이데올로기가 세계를 평정했다. 효율과 이윤을 숭배하는 시장경제는 자유경쟁을 신성 불가침한 것으로 간주한다. 이 이데올로기는 경제 영역을 넘어 정부·교육·문화·복지 같은 사회 모든 부문으로 침투했다. 이러다보니 폐단이 등장했다. 소수의 승자만이 생존하는 약육강식의 세계가 도래한 것이다.

미국의 사례는 시장경제의 우울한 미래를 이미 예고하는지도 모른다. 미국은 세계 최대 채무국이다. 서브프라임모기지 부실 사태는 실체는 없고 거품만 있는, 말 그대로 돈 놓고 돈 먹기 식의 성장만 추구해왔다. 외형에 비해 살과 뼈대가 무척 부실했던 것이다. 미국만큼 사회적 양극화가 극심한 나라도 드물다. 시장경쟁 체제도 70년 만에 소멸된 공산주의 체제와 마찬가지로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 또 다른 이데올로기로 대체될 수밖에 없다.

미국식 가치는 자유와 개인소유권의 확대이다. 사회복지의 모델은 개인의 소유가 가능한 범위를 넓히는 것으로 삼았다. 다분히 부자들만 좋은 기준이다. 그러나 유럽식 가치는 다르다. 이걸 집대성한 책이 바로 제러미 리프킨이 쓴 ‘유러피언 드림’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어제로 1주기를 맞이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생을 마감하기 직전까지 읽었던 책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부시의 미국적 가치와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통렬한 비판서이다.

유럽연합은 개인의 자유보다 공동체 내의 관계를, 동화보다는 문화의 다양성을 강조한다. 또 부의 축적보다는 삶의 질을, 무제한적 발전보다 환경보전을 염두에 둔 지속 가능한 개발을, 일방적 무력행사보다 다원적 협력을 우선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사회적 약자 배려와 공동체 구성원 전체의 행복과 복지라는 인류의 미래를 향한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이것이 ‘진보’ 또는 ‘좌파’의 이념적 특성으로 소개되고 있다.

유럽연합의 국내총생산은 미국의 것을 넘어섰고, 10만 명당 의사 수도 EU가 우세하다. 산업화를 이룬 국가들 가운데 영아사망률도 미국보다 EU가 훨씬 낮으며, 평균 수명도 EU가 높다. 부의 분배, 소득 불균등, 살인사건 발생 건수, 교도소 수감자 통계를 통해서도 미국은 EU보다 훨씬 뒤떨어진 삶의 질을 보여 주고 있다.

하지만 유럽의 조세 부담율은 30~40%로 우리의 22%대보다 훨씬 높다. 세계 최고의 복지를 자랑하는 북유럽 국가의 부자들은 세금을 더 많이 내기 위해 돈을 번다고 할 정도다. 그러나 다른 한 쪽에서는 과중한 세금 부담을 미국식 논리로 해석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공동체성이 강한 유럽에서는 ‘내 것’에 대한 관심이 과도하지 않다는 것이다.

누군가 유럽인의 과도한 세 부담을 이렇게 이야기하더라. “내가 이 땅에서 안전하게 살면서 수입을 얻었다면, 그건 내가 잘해서만이 아니라 이 땅에 함께 사는 많은 이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며, 그런 환경을 만들어준 정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세금은 그에 대한 대가다.”

한편 리프킨은 유러피안 드림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유럽인들의 염세주의와 냉소주의가 극복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2004년 5월 영국 BBC 인터넷 뉴스는 서아프리카 국가 기니의 30대 남성이 겪은 유러피안 드림의 실체를 보도했다. 많은 돈과 4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겨우 유럽에 왔지만 그가 겪은 것은 아프리카인들에 대한 차별대우였다. 그는 “유러피안 드림은 악몽이었다”고 말했다.

유러피안 드림이라는 이상과 유럽의 현실 사이의 괴리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유러피안 드림은 그저 백일몽에 그칠지 모른다는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