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111개 대학이 7년 동안 상반기에 수여한 명예박사 학위 현황. 어제 한 신문이 보도했다. 이 기간 동안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한 인원이 1045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번 지방선거에서는 총 100명이 명예박사라고 하는데, 2개 이상 취득한 사람도 15명이라고. 광복 이후 2개 이상 명박을 받은 3명중 1명이 정·관계 인사들이다. 주목되는 것은 단체장 가운데 명예박사가 매우 많다는 점이다.

실제로 명예박사 정치인들은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후보로 뛰고 있다. 전국 16개 시도지사 선거 출마자 가운데 부산시장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허남식 김정길 후보, 안상수 인천시장 후보, 현명관 제주도지사 후보 등 명예박사는 7명이나 된다. 서울시 구청장 후보 가운데도 정송학 광진구청장 후보, 김기성 강북구청장 후보 등 명예박사 소유자가 4명이나 된다.

명예박사, 이것도 박사는 박사인데, 누구에게 어떤 이유여야 줄까. 고등교육법 시행령 47조는 명예박사의 조건을 ‘학술발전에 특별한 공헌을 하였거나 인류문화의 향상에 특별한 공적이 있는 자’로 규정하고 있다. 너무 모호하지? 이러다보니 실제로 대학들은 자율을 빌미로 정·관·재계 인사들을 대상으로 명예박사학위 수여 경쟁에 몰두해왔다. 공학에 관해서는 관련 개론서로 안 읽은 사람이 당 대표라는 이유로 명예공학박사 학위증을 받은 경우도 있다.

역대 최다 학위 수여자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이미 국내 5개 대학과 미국·영국의 6개 대학에서 명예 정치학·경제학·문학·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바 있는데 ‘명박(名博) 12관왕’에 오르게 됐다고. DJ의 ‘12관왕’도 이케다 다이사쿠 국제창가학회 회장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SGI는 일본 불교종파의 하나인 일련정종(日蓮正宗)의 한 분파인데 무려 203개의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는 소정의 과정을 이수하고, 논문이 통과돼야 학위를 취득하게 되는데, 명예박사학위는 이런 복잡한 과정을 생략해도 가능하다. 특별한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이라면 자격이 인정된다. 명망이 높은 사람이나 사회적 공헌도가 큰 사람들에서 주된 명예박사 수여대상이었지만 학교에 기부금을 많이 낸 재력가들도 최근 들어서는 심심찮게 명예박사학위를 받곤 한다.

정치인에 대한 학위 남발도 문제이다. 학교와 정치인, 정치인과 학교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치인으로서는 능력을 인정받는 의미가 있는 데다 미래의 표밭이 되는 ‘동문’을 넓힐 수 있다. 대학들로서도 특정인과의 이해관계를 맺거나 ‘인맥’을 넓히는 데 이만한 방법이 없다.

박사학위를 받는 사람과 학교 사이에 검은 유착이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A대학은 몇 년 전 높이제한에 걸려 있던 캠퍼스 부지에 복합관 신축을 준비중이었다. 그런데 이 A대학이 있는 도시의 시장이 이 학교로부터 명예박사학위를 제안했다. 그러자 A대학의 건축 계획을 1차 반려했던 이 도시는 몇 개월 뒤 도시계획위원회 심의를 거쳐 원안대로 통과시켜줬다. 학교측은 물론 학위와 건축은 별개라고 강변한다.

물론 명예박사 학위, 딸 만하니까 따는 거라고 주장하는 정치인도 있다. 부산대에서 명예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은 한 정치인은 “이 학위는 내가 장관으로 있을 때 보여준 행정능력과 지역사회 발전에 이바지한 부분을 인정받은 것”이라며 “남발된 다른 명예박사 학위와는 다르다”고 밝혔다. 사실 명예박사학위의 취지에 걸맞은 케이스도 없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명예박사학위가 명실 공히 경의와 존경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려면 철저한 학위 관리가 전제돼야 한다.

따지고 보니 우리나라에서는 박사라는 이름을 쓰고 부르는 게 최고의 영예로 인식되고 있는 현실도 무시할 수 없다. 한국 현대정치사는 ‘박사의 정치사’였다. 이승만·김규식·장덕수·조병옥·장면 등 해방 이후 1960년대 초까지 한국정치를 지배했던 거물들이 모두 박사였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경우, 대통령보다 박사라는 호칭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 이들은 단순히 정계의 보스여서가 아니라, 일제시대 보통사람은 꿈도 꿀 수 없는 ‘외국박사’를 했다는 ‘특별신분’이 주는 카리스마로 인해 대단한 존재가 된 인물들이다.

한국 사회에 박사는 어떤 의미일까. 사실 박사는 명예와 존경뿐 아니라, 돈까지 가져다 준다. 개업한 의사, 세무사가 박사학위 수여증을 값비싼 액자에 넣어 사무실에 걸어두면 영업도 잘된다. 그러다보니 검은 시장도 번창한다. 논문대필 인터넷 사이트는 30여개나 된다. 500만 원이면 대졸실업자나 대학재학생이 논문 한편 뚝딱 써준다.

어제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시간강사가 논문 대필 사실을 유서에다 폭로했었다. 최근 부패방지위원회가 발표한 신출귀몰한 ‘가짜 박사 이야기’는 정말 엽기적이다. 미국에 가본 적도 없는 체육단체 임원이 미국 대학 박사학위를 받고, 1주일 동안 미국관광을 한 대학교수가 미 대학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는가 하면, 러시아 대학인데 논문이 한글이라고 한다. 진짜 박사실업자는 느는데 가짜 박사수요는 폭발하고 있는 것이다. 박사가 존경받으려면 박사의 권위가 오롯해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