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시민권) 속지주의'를 폐지하는 법안이 미국 안에서 새로운 쟁점이 되고 있다.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가 보도했는데. 미국은 수정헌법 14조에 따라 자기나라 출생자에게는 부모의 국적과 상관없이 무조건 시민권을 주는 '속지주의' 또는 '출생지주의' 원칙을 따르고 있다. 그러니까 미국에서 출산하면 미국 시민권을 얻는 것이다. 이러다보니 애 낳을 때면 미국으로 건너가는 임신부가 적지 않았다. 이른바 원정출산하러 간 거지.

그런데 왜 이걸 없애려 하는 것일까. 빈곤층이 크게 늘고 있기 때문이다. 비정부기구인 '퓨히스패닉센터'의 지난 4월 보고서를 보면, 미국 안에서 시민권을 얻는 불법 이민자 자녀가 빠르게 늘고 있다고 진단한 내용이 있다. 2003~2008년 사이 시민권을 획득한 불법 이민자의 자녀는 270만 명에서 400만 명으로 50% 가량 크게 늘었다. 이들의 1/3은 빈곤상태에 머물러 있는데, 이는 미국인 부모 가정의 자녀가 불우한 환경에 처하는 것에 비해 2배에 육박하는 것이다.

최근 애리조나주에서 벌어진 논란이다. 지난해 91명이 하원에 공동 발의한 '출생 시민권 법안'은 속지주의를 제한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법안에 따르면 부모 중 적어도 한명이 ▲시민권자 ▲현재 미국에 거주하는 영주권자 ▲국방 관련 업무에 현재 종사하는 외국인 같이 3가지 경우 가운데 어느 하나에 해당하면서 동시에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에게만 시민권이 부여된다.

법을 고치려는 배후에 공화당이 있다고 한다. 미국 언론과 공화당을 중심으로 “원정출산은 수정헌법 14조의 의미를 더럽힌다”는 비판이 나온다. 이걸 없애려 한다면 개헌을 해야 하는데. 미국은 우리나라만큼 헌법 개정이 까다롭지 않다. 원정출산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더 높아지면 언젠가 속지주의 조항이 헌법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 그때가 돼서야 한국 엄마들의 원정출산 행렬이 멈출지 모르겠다. 시민으로서 의무는 다하지 않고 혜택만 보려는 원정출산을 배척해야 한다는 것이 미국 안에 분위기이다.

속지주의, 이걸 따르는 나라가 몇 안 된다. 신문에 따르면 전세계적으로 속지주의 정책을 택하는 국가는 약 30개국이며 주로 신대륙에 있다. 이들은 역사적으로 이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나라들이다. 당초 미국의 수정헌법 14조는 남북전쟁 후에 과거 노예들에게 미국 시민권을 부여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하지만 근래 들어 영국과 인도 같은 속지주의를 택하고 있던 나라들도 외국인이 크게 늘어나면서 속지주의를 둬야 할지 없앨지 고민하고 있다고.

미국 보건통계센터가 2006년에 태어난 신생아 427만3225명을 조사했는데 7670명이 미국에 살지 않는 외국 여성의 아이였다고. 이 중에는 유학 또는 미국 출장 중에 아이를 낳은 여성도 있지만 대부분 자녀의 시민권 획득을 위해 미국에 찾아가 아이를 낳은 산모들이다. 미국에서 태어난 한국인은 22세 이전에 선택하는 국적에 따라 병역을 면제받을 수 있다. 주립대학에 진학할 경우 외국인 유학생에 비해 학비를 절반만 내는 혜택도 누린다.

따지고 보니까 괌도 미국 영토인데, 여기로 가서 원정출산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얼마전 괌의 현지 언론이 괌을 찾는 한국인 원정출산족의 실태를 고발하는 기사를 잇달아 보도했다. 괌의 한 병원 의사는 지난 여름 한국 임신부의 출산을 위한 계약을 맺자고 접근해왔으나 거절했다고 말했다. 4년 전에도 같은 제의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 의사는 관광객들이 의학적으로 도움이 필요할 때 당연히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겠지만 "그러한 목적으로 특별히 계약을 맺지 않는다"라고 강조했다. 한편 이미 중계 사이트가 운용되고 있는데, ▲한국서 태아검진 ▲괌메모리얼병원서 출산 ▲출산 1주일 내 여권과 사회보장번호 수령 ▲2-3주 내 한국 귀국 등 임신부를 위한 4단계 원정출산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이미 시장이 형성돼 있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우리나라가 내년부터 복수국적은 제한적으로 허용하되, 원정출산은 배제하기로 했다. 내년 1월부터 국내에서 외국 국적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면 복수 국적이 허용된다. 이에 따라 만 20세가 되기 전 복수국적자가 된 사람은 만 22세 전에, 만 20세가 된 뒤 복수국적자가 된 사람은 그때부터 2년 내에 대한민국 국적을 선택하려는 경우 외국 국적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면 복수 국적을 유지할 수 있다. 다만 원정출산으로 복수 국적을 가진 사람은 현행법과 마찬가지로 외국 국적을 포기해야만 한국 국적을 선택할 수 있어 복수국적 유지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결코 바람직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원정출산은 순산이더라도 최소 3천만원이 들고 부작용이 있을 때는 1억원까지 든다고 한다. 엄청난 비용이 드는 원정출산은 병역기피 의도가 숨겨져 있는 등 비난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자녀에게 값싸고 질좋은 교육을 받게 하겠다는 것이나 자녀의 국적 취득을 통해 자신들의 이민을 보다 쉽게 하겠다는 욕구는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다.

이 문제를 이기심으로만 보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치솟는 사교육비와 실업 급증, 정치권의 끝없는 혼란 등으로 20·30대의 70% 이상이 이민을 생각하는 사회에선 원정출산이 확대될 수밖에 없다. 살기좋은 나라를 만드는 것이 국제적 망신과 도덕적 추락을 막는 첩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