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첫 국어교과서를 집필한 원로 국어학자 박창해 전 연세대 교수. 지난 6월 14일 아침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4. 박창해 선생은 1945년 광복 뒤에 미 군정청 문교부 편수사로 근무하면서 서구의 언어학 이론을 도입했다. 그리고 ‘철수와 영희, 바둑이’ 이야기가 나오는 첫 초등학교 국어교과서를 집필했다. 철수와 영희 이야기가 있는 국정교과서가 처음 나온 날, 10월 5일은 '교과서의 날'로 기념되고 있다.

이 교과서는 우리 국어교육의 중대한 분깃 점이었다. 그 이전만 해도 우리 국어교육은 ‘가갸거겨’ 낱글자만 학습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미국의 음운 교육방식을 도입했다. 이종국 혜천대 교수가 쓴 '한국의 교과서상'에 보면,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바둑이가 미국 초등학교 교과서의 내용 'Come Come Spot'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Spot은 얼룩강아지, 즉 바둑이를 뜻하지? 그래서 '이리 온 이리 온 바둑이' 이렇게 차용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 첫 단원에서 끝 단원까지를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가는 방식의 교육도 주목된다. 이걸 스토리 메소드형 편찬법이라고 하더라. 최근 보편화된 '스토리텔링'의 필요성을 이미 60여 년 전부터 인식한 것이 아닌가 하는 풀이도 가능하다. 만약 가갸거겨만 배우고 단원별로 단절된 내용만 접했다면, 우리 기성세대에게, 철수와 영희, 바둑이를 잊지 못할 정겨운 이름으로 새긴 아련한 향수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기억하나. 1960년대 시골에서는 대체로 검정 고무신을 신었던 터라 삽화에 등장하는 철수와 영희가 신은 운동화가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것을.

사실 영희가 아니라 영이였다. "영이야, 이리 와. 나하고 놀자. 영이야, 이리 와, 바둑이하고 놀자." 정부 수립 후 처음 나온 국정교과서에 이렇게 새겨져 있다. 언제 영이가 영희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철수와 영희는 '국민 이름'이었고 보통명사에 가까웠다. 여담 이다만, 철수와 영희 또 바둑이 말고도 복남이, 영수 같은 철수의 동무가 등장한다.

그런데 철수와 영희 그리고 바둑이의 롤 모델이 있었다. 다시 이종국 교수의 책을 열어보자. 철수의 모델은 개화기 당시 김지학, 박정복 어린이이었다고 한다. 1896년 ‘신정심상소학’이라는 교과서에 등장하는 실존인물이라고. 이 두 어린이가 '대한의 씩씩한 어린이상'을 대변했다고 한다. 이 어린이가 누구 자녀이고, 어떤 일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영희는 당시 난희, 순희, 정희로 알려진 '신식 소녀'가 모델이 되었단다. 뭐 여기까지가 알려진 내용의 전부다. 설명하면서 나온 이야기인데, 대한제국 때도 국어 교과서가 있었다. 당시에는 난희, 순희, 정희 외에 복동이와 순만이 또 창근이와 일남이, 영길이, 준선이가 있었다고 한다.

요새 교과서에도 철수와 영희가 나올까? 아니다. 왜 사라졌을까. “1948년부터 초등학교 다닌 철수와 영희가 아직도 어린이겠나. 다 시집 장가가서 손자 손녀 보지 않았겠는가” 누군가 이런 농담을 하더라. 트위터를 통해 요새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어린이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꽤 많은 답을 얻었다. 승민이, 지민이, 미나, 수지, 예승이, 가은이, 창현이, 민석이, 윤수, 승환이, 인철이 이렇다고 한다.

철수 영희의 상징성이 워낙 두드러지다보니 이를 빗댄 우스갯말도 많이 나왔다. 이른바 ‘교과서별 지문 시리즈’가 대표적인데.

우선 도덕 교과서. 철수 : 영희야 미안해 내가 좀 늦었지? / 영희 : 괜찮아, 철수야. 다음부터는 늦지 마. / 철수 : 고마워. // 다음은 영어 교과서. 철수 : 미안해, 영희야. 오는 길에 버스가 너무 늦게 와서……. / 영희 : 너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좀 더 일찍 일어났어야만 했어. / 철수 : 맞아……. 일찍 일어났어야만 했는데…….

그리고 국어 교과서. 철수 : 애석하구나. 이 내 몸은 오늘 또 늦어 버렸네. / 영희 :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지각 좀 하면 어떠하리. / 철수 : 어와 성은이야 가디록 망극하다.

논술 교과서 버전도 있다. 철수 : 대단히 유감이다, 영희야. 오는 길에 우리 사회의 고질적 문제인 교통체증과 맞닥뜨렸지 뭐니? 정부는 신속히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고 생각해. 개인들도 자가용 이용을 자제해야 하고. / 영희 : 너는 지금 너의 불성실을 교통문제에 전가하는 책임회피의 오류를 저지르고 있어. / 철수 : 책임회피의 오류라고? 그럴지도 모르지만 나의 견해는 너와는 달라. 한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는 것은 합리적 지식인의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 함께 진지하게 이 문제에 대해 토론해 볼까?

다문화 가정이 늘고 있는 시대이다. 우리 국어 교육 역시 순혈주의, 단일민족논리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철수, 영희만 나오던 한국용 교과서에서, 다문화 가정의 이국적 이름도 접하게 되고, 샘, 나카무라, 왕서방 같은 지구촌 구성원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나오는 교과서로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 나만의 것일까. 우리말의 세계화를 부르는 노력, 교과서에서도 발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