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귓가에 귀뚜라미 소리 들리더니 우리는 어느 덧 가을의 품속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가을은 우리에게 오곡의 풍요와 백화의 아름다움을 주는 고마운 계절입니다. 기나긴 혹서(酷暑)에 지친 우리에게 청량한 휴식의 때를 주기도 합니다. 가을은 땀흘려 이룬 풍요를 우리에게 주는 만큼 점점 비어 가는 자연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덕수궁의 새봄을 제일 먼저 알려주던 능수벚나무 잎이 하나 둘 떨어지고, 나뭇가지 사이를 불어오는 바람은 우리의 마음에 무엇인가를 준비할 것을 알려주는 듯합니다. 때로는 가벼운 바람인 듯 내 곁을 스쳐갔던 속삭임이며, 집요한 미련으로 아직도 내 가슴에 머물러 혼돈케 하는 인연들, 흔들리는 일상의 버팀목이 되는 아름다운 인연의 목소리들, 때로는 바람으로 눈물로 소나기 같은 감정의 격함으로 다가오던 순간순간의 의미들을 되새김해 보아야할 때가 이 가을이 아닌가합니다.

오늘은 가을하늘이 맑아 마음의 앙금이 씻기는 듯한 날입니다.
가을이면 가장 우리에게 친근하게 다가오고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어린이들에게 가을이면 가장 생각나는 꽃이 무슨 꽃이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인 예빈 이라는 아이가 손을 번쩍 들고 대답했습니다.

"코스모스입니다." 그 순간 나의 마음이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어린아이의 대답이 바로 나의 마음에 있었던 꽃이었습니다.
신작로 양옆에, 학교 가는 길에 한들거리며 피어있던 빨강, 분홍, 하얀 꽃의 그 흔들림을 나는 잊지 못합니다.
지난 추석에 고향을 다녀오면서도 일부로 코스모스가 피어있는 길을 골라서 올라왔습니다. 코스모스는 나의 누이를 생각나게 하는 꽃이기도 하고, 어린 시절 함께 자라던 계집아이들의 모습이 담겨있는 꽃이기도 하지요. 지금도 가을이면 나에게 가장 친근하게 다가오는 꽃이 코스모스요.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그 가냘픈 꽃잎의 감동이 가슴에 살아 있습니다. 코스모스는 나의 마음의 꽃이 되고 말았습니다.

또 하나 가을이면 나의 마음속에 생각나는 것은 장독대 위에 오순도순 모여 사는 항아리들입니다. 어머니의 손길이 닿아 언제나 반짝반짝 빛나던 모습, 바깥쪽으로 큰항아리의 호위를 받으면서 점점 작은 모습의 항아리들이 서 있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장독대는 햇빛이 가장 잘 드는 양지쪽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간장을 담가놓은 큰항아리며, 김치 항아리, 고추장 항아리 등 우리 식구의 일년 먹을 음식 맛이 익어 가는 곳이었습니다.

어느 날인가 가을이 시작될 무렵이었습니다. 김치항아리며, 간장을 담갔던 항아리를 깨끗하게 비우고 맑은 물을 가득 담아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아마도 항아리에 배어있는 냄새들을 우려내기 위하여 물을 담아 놓았을 것입니다. 지금도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은 고향정취를 가득 담고 있는 항아리에 파란 가을하늘이 내려와 있었던 것입니다.

물 속에 어른거리는 모습 속에서 파란 하늘도 살아서 함께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맑은 물 속에 들어있는 파란하늘은 저 높은 곳에 있는 파란 하늘보다 훨씬 더 나를 감동시켰습니다. 그것은 하늘이 나를 만나기 위하여 항아리 속으로 들어와 내 곁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항아리 속에 김치 같은 음식물이 가득 들어 있을 때는 뚜껑이 닫혀있었고, 항아리 속엔 파란 하늘이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비우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열때 우리의 마음에도 파란 하늘이 내려올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무엇인가 그 모습 속에서 느끼는 감동이 있습니다. 파란 하늘아래 햇빛이 한가하게 머무는 장독대, 그 주위엔 맨드라미 정열이 불게 타오르고, 채송화 아름다운 꽃들이 올망졸망 재미있는 소꿉놀이를 하는 곳. 나 사랑하는 고향집 장독대 위엔 지금도 고추잠자리가 날고 있을 것입니다.

며칠 전에 누군가에게 좋은 책을 선물 받았습니다. 뜻밖에도 그곳에서 나는 내 마음의 항아리를 발견했습니다. 마음의 항아리라는 제목의 글 속에서 고향집에 파란 하늘을 담고 있던 항아리를 보았습니다. 또 무엇인가 가득 채워져 깜깜한 내 마음의 항아리도 동시에 보았습니다. 왜 그런지 마음이 너무나 답답합니다. 나의 마음의 항아리에도 파란 하늘이 내려왔으면 좋겠습니다.

가을이면 잠자던 마음의 울림이 오늘은 이렇게 다가옵니다. 아름다운 코스모스처럼, 파란 하늘처럼, 파란 하늘을 담은 항아리처럼 살아가고 싶습니다.

이 가을에 마음의 항아리를 비우고 파란 하늘을 가득 담아보고 싶습니다. <은천>

/시인, 한강교회 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