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설날은 참으로 기다려지는 명절이었습니다. 가난한 살림에도 어머님은 어김없이 설빔을 준비하셨고 집안 여인네들은 며칠 전부터 큰집(宗家)인 우리 집에 함께 모여 설 준비를 했습니다. 때가 묻어 색이 변한 놋그릇을 지푸라기 뭉치에 기왓장을 잘게 부수어서 만든 와분(瓦粉)을 묻혀서 윤이 나도록 닦고, 콩을 갈아 두부를 빚었고, 전을 붙이고, 가래떡을 만들었습니다. 남자들은 집안의 먼지를 털고, 한지(韓紙)를 붙여서 만든 창호(窓戶)마다 악귀의 범접(犯接)을 막는다고 솔가지(소나무 가지)를 꺾어다 끼우고, 입춘대길(立春大吉)이나 개문만복래(開門萬福來)라는 글씨를 써서 대문에 붙였습니다. 어린 우리들은 덩달아 즐겁고 무슨 큰 수가 나는 듯 설날을 기다렸습니다. 대소가(大小家) 친척들이 모이는 것이 즐겁고 맛있는 음식 장만이 즐거웠고 새 옷을 입고 세배를 하고 세뱃돈을 받는다는 부푼 기대로 설을 기다렸고 즐거운 명절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된 지금은 설날이 마냥 즐겁기만 한 날이 아니라 또 하나의 행사를 치러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느껴지는 날이기도 합니다. 특히 여자들은 상(床)을 차리고 손님을 맞고 대접해야 하는 일로, 일가친척의 아이들이 세배를 오면 얼마라도 세뱃돈을 주어야 하고 또 어른들에게 세배를 가야 하는 등 즐겁기만 하면 되는 어린아이 때와는 달리 책임을 지고 어른 노릇을 해야 한다는 것이 명절의 기쁨과 함께 부담이 되기도 합니다.

더욱이 온 가족이 다 믿지 않는 짝 믿음의 가정에는 제사문제로 인한 갈등으로 정말 즐겁지 못한 명절을 보내기 일쑤입니다. 불신가족이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늘 제사문제로 긴장이 조성되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효도행위이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이 무슨 큰 불효를 하는 것인 양 취급되어 명절의 즐거움을 다 망쳐버리게 되기도 합니다. 즐거워하기만 하면 되는 명절이 아니라 남을 즐겁게 해 주어야 하는 어른의 명절은 나름대로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명절을 지나간 세시풍습이나 제사나 드리는 미신적 전통으로만 취급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런 우리의 전통적인 문화를 더 적극적으로 기독교화 시켜서 축복의 신앙명절로 승화(昇華)시킬 책임이 있습니다. 설날은 축복의 제사(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문화에 소외되거나 침식당할 것이 아니라 도리어 기독교적 문화로 점령(?)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흩어진 가족이 함께 모이고 가난한 이웃을 돌보고 서로 나누는 아름다운 전통을 더 적극적으로 발전시키고 새해에 온 가족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신앙적 가문의 전통을 만드는 신앙적 세시(歲時) 풍속을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좀 더 힘들고 부담스러워도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린 자녀들에게는 가문의 전통이나 문화 그리고 조상들의 은혜에 대하여도 잘 가르쳐 주어서 자기 가문에 대한 긍지를 높여 줄 필요가 있고 가정의 소중성과 가족의 의미를 가르치는 기회로 삼을 필요가 있습니다. 가정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하는 것은 효도를 가르치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른들은 집안의 어른으로서 또는 기독교 신앙인으로서의 책임도 잘 감당해야 합니다. 나누고 섬기는 일에 인색하지 말고 좀 더 후한 마음으로 신앙의 능력과 자랑스러움을 보여줄 기회로 선용하여야 합니다. 힘들고 피곤해도 고향엘 가고, 혹은 친지나 친척들을 찾아 만나고 나누어야 합니다. 그리고 선물을 주고 세뱃돈도 좀 주는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이런 기회에 오랫동안 소원(疎遠)했던 친척이나 친지도 찾아 봐서 관계를 회복하는 기회로 삼을 필요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웃에 대한 배려도 잊지 말고 서로 나누고 함께하는 사랑의 본을 보여 줄 필요가 있습니다. 설날은 마음을 새롭게 하고 기대와 소망으로 새해를 시작하는 날이고 특히 구정(舊正)인 설날은 축제적 의미를 가진 명절이므로 온 가족이 기뻐하고 서로 축복하고 격려하는 날로 지킨다면 참으로 의미 있는 명절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교회에 주신 2011년의 지상 명령 “생육하고 번성하여땅에 충만하고, 세상을 정복하고 세상을 다스리는 가문”으로 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양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