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자살한 배우 고 장자연씨의 자필 문서가 공개됐는데 갈수록 파장이 커진다. SBS 8시뉴스가 지난 일요일, 2009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배우 고 장자연씨의 비밀 문건을 입수해 보도했다. 문건에는 고인이 성접대를 강요받았다는 내용이 자세히 적혀 있다. SBS는 공인 전문가에게 필적 감정을 의뢰한 결과 고 장자연씨의 필체가 맞다는 결과를 얻었다고 밝혀서 타당성을 더했다.

하지만 경찰은 그 필적감정을 믿지 못하는 모양이다. 경찰은 SBS가 사본을 갖고 있다면 크게 비중을 두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원본을 갖고 있어야지 사본을 갖고서 감정에 신뢰도가 없다는 입장이다. 무슨 이야기일까. 사람마다 글씨를 쓸 때 힘을 주게 되는 만큼 ‘필압’이라는 것이 있는데 사본으로는 필압이 어느 정도인지 감정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면 원본감정보다는 신뢰도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한 전문가는 원본과 사본의 신뢰도 차이가 30%라고 했다.

경찰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 사본은 자필인지 아닌지 증거로서 쓰임새가 없다는 것일까. 하지만 전문가의 의견은 다르다. '필적은 말한다'의 저자인 구본진 법무연수원 교수는 "요즘은 인터넷 자료만을 보고도 감정을 한다. 때문에 사본 감정 결과라 해도 오류의 가능성은 거의 없다"면서 "사본이라도 글씨 특징이 나타날 수 있는 자료라면 충분히 대조가 가능하다"고 했다. 사본으로도 자필여부를 충분히 판단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번 경우, SBS가 공인 전문가로부터 확신 있게 장자연 씨 필체임을 확인받은 것이다. 그 공인 전문가가 한 ‘장자연 필체가 맞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는 이유는 사본의 상태가 상당히 양호할 뿐만 아니라 이 감정이 글자 몇 개 보고 판단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SBS가 입수한 문건이 50통 230쪽 분량이다. 어마어마한 표본이다. 아무리 뛰어난 전문 위조 전문가라도 타인의 필적을 이렇게나 많이 위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설명이다.

경찰은 그렇다면 편지를 확보하기도 전에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다는 식으로 나올까. 그동안 SBS가 지적한대로 장자연 씨 사건에 대해 석연치 않은 이유를 들어 덮어두기에 급급했던 점, 이런 부실수사로 인해 불거진 책임 추궁에서 벗어나려는 의도가 뚜렷하다. 현재 경찰의 공식적인 입장은 "확보되는 문건이 장자연 씨가 직접 쓴 원본으로 확인되면 재수사에 착수해 문건 내용에 대한 사실 관계를 가린다"는 것이다.

2년 전 장자연 씨 사건이 터졌을 때에도 당사자가 쓴 편지가 공개되지 않았나? 그때도 장자연 씨의 필체와 같은 것으로 드러났고 말이다. 2년 전 장자연 사건 수사팀은 '장자연 문건'의 원본을 확보하지 못했지만 확보된 사본 문건을 토대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필적 감정을 의뢰했다. 결론은 어떻게 나왔을까. 장자연 씨의 것과 필체가 거의 동일하다는 결과를 받았다. 하지만 '거의 동일하다'라는 표현을 썼다. 사본에 대해서는 확정해서 '일치한다'고 단정하지는 않는 관행 때문이다. 그래서 장자연 씨가 직접 쓴 친필인지 판단할 수 없다고 밝혔다. 경찰은 '거의 동일하다' 보다는 '직접 쓴 친필인지 판단할 수 없다'는 점에 무게를 두고 편지 내용에 대해 비중을 싣지 않았다.

따라서 이번에도 사본이라는 이유만으로 덮어둘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하지만 그렇게 나오기엔 부담이 크다. 부실 수사 논란이 벌써부터 제기됐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경기경찰청의 한 관계자가 <동아일보> 기자에게 던진 한마디는 많은 점을 시사한다. 경찰의 앞으로의 대응 논리가 훤히 보인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말이었다. "2년 전 모 방송사에서 입수한 장자연 문건의 경우 'ㅎ', 'ㅊ'자의 머리 삐침이 모두 기울어져 표기됐는데, 이번에 언론을 통해 공개된 장자연 씨 편지의 글씨체에는 이 자음의 머리 삐침이 모두 반듯이 세워져 있어 필체가 다른 것으로 판단된다."

필적감정의 검사방법은 어떻게 이뤄지는 것일까. 위조 여부를 가리기 위해 감정관들은 먼저 그 사람이 쓴 편지나 공문, 메모 등 다양한 필체를 확보한다. 이어 글씨가 꺾일 때의 각도, 필순, 특정한 습관을 다양하게 분석한다. 그 사람이 쓸 때는 그 모양은 각기 다르지만 그만의 독특한 '공통적인 습관'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같은 사람이 비록 다른 글씨체로 쓰더라도 '공통적인 습관'은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이를 조사하면 누가 썼는지 알아낼 수 있다. 그렇다면 경찰이 히읗 치읓의 머리 삐침을 문제 삼는 것은 아주 지엽적인 접근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필적감정,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의 필체는 어느 것 하나 똑같은 것이 없고, 자신도 똑같은 글씨를 되풀이하기 어렵다. 따라서 경향성에 무게를 둬야 한다. 경찰은 지레 결론부터 내려놓고 이 문제를 접근하려 하고 있다. 적절할까?

갑자기 노태우 대통령 시절 민주화 운동을 하다 숨진 김기설 씨의 유서 대필사건이 생각난다. 1991년 4월, 서강대학교에서 재야단체 간부였던 김기설 씨가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분신 자살했다. 당시 수사기관은 현장에서 발견된 김기설 씨의 유서가 동료인 강기훈 씨에 의해 작성된 것이라며 자살 방조 혐의로 강기훈 씨를 구속했다. 그때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유서의 글씨체가 강기훈 씨의 필체와 일치한다는 감정 결과를 내놓아 수사기관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그 유서가 숨진 김기설 씨 것이 맞고, 강기훈 씨는 무고하다고 했다. 국과수 관계자들이 잘못 판정했다고 시인했다고 하고. 한 사람의 명예가 회복되기까지 무려 16년이 걸린 셈이다.

장자연 씨 수사에 대한 경찰의 판단은 어이없다. ‘술자리는 같이 즐기러 간 것’이고, ‘성 상납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막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꽃다운 여배우는 극한 저주의 말을 퍼부으며 세상을 떠났을까. 사람이 죽은 문제이다. 망자가 말이 없다고 대충 처리할 문제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