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이 가지는 유일한 단점은 그것이 몹시 게으르다는 것이다. 진실은 언제나 자신만이 진실이라는 교만 때문에 날것 그대로의 몸뚱이를 내놓고 어떤 치장도 설득도 하려 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진실은 가끔 생뚱맞고 대개 비논리적이며 자주 불편하다. 진실 아닌 것들이 부단히 노력하며 모순된 점을 가리고 분을 바르며 부지런을 떠는 동안 진실은 그저 누워서 감이 입에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세상 도처에서 진실이라는 것이 외면당하는 데도 실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면 있는 것이다. (소설,165쪽) “민주화되고 나면 더 이상 이런 일 안할 줄 알았어요. 화가 난다기보다는 뭐랄까요? 견고한 저 성벽이 정권이 바뀐다고 변하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결국 예수가 다시 온대도 또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겠구나 싶기도 하구요. 저런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또다시 예수를 죽이겠지요?.” (소설,189쪽) 가진 자가 가진 것을 빼앗길까 두려워하는 에너지는 가지지 못한 자가 그것을 빼앗고 싶어 하는 에너지의 두 배라고 한다. 가진 자는 가진 것의 쾌락과 가지지 못한 것의 공포를 둘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진 자들이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거짓말의 합창은 그러니까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포함하고 있어서 맑은 하늘에 천둥과 번개를 부를 정도의 힘을 충분히 가진 것이었다. <소설의 줄거리>사업에 실패하고 아내 친구의 소개로 우연히 자애학원의 기간제 선생으로 부임하게 된 강인호는 처음부터 자존심에 상처를 받는다. 학교 발전기금이라는 명목으로 5천만 원을 내고 자애학원의 선생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권력자들에게 저항할 수 없는 약점이 된다. 그랬던 그가 교장과 행정실장의 성추행 사실을 고발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 것은 저항할 수 있는 아무런 힘도 수단도 없는 가여운 농아들에 대한 사랑과 의리였다. 그리고 그것이 돈 때문에 빼앗겼던 자기의 자존심을 되찾아 올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가족이라는 현실이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딸 수애. 농아들에게도 강인호가 필요했지만 아내와 딸에게도 강인호는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아내는 소설 속에서 강인호가 현실과 타협해야하는 순간마다 궂은일을 자처한다. 친구에게 기간제 교사 자리를 청탁한 것도 아내였고, 학교발전기금을 마련해 준 것도 아내였다. 그리고 농성장이 철거되는 새벽 강인호가 현장으로 갈 수 없었던 이유도 아내가 그를 데리러 서울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함께했던 사람들과의 연락을 끊고 아내와 함께 서울로 올라간다. 강인호는 농아들과 끝까지 함께 하면서 돈의 노예가 되는 길을 거부하고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다. 그러나 가족을 버릴 수는 없었다. 그가 투사가 되어 농아들의 인권을 지키고, 사회의 부조리를 끝까지 용서하지 않았다면 소설을 통해 또 다른 대리만족을 느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삶의 치열한 정글인 서울이라는 숲으로 몸을 숨긴 강인호를 욕할 수만은 없다. 그게 현실이고 세상은 너무나 각박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그렇게 우리를 길들인다. 세상을 바꾸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강인호와 달리 농아들과 끝까지 남아 싸우는 서유진은 말한다. "세상 같은 거 바꾸고 싶은 마음, 아버지 돌아가시면서 다 접었어요. 난 그들이 나를 바꾸지 못하게 하려고 싸우는 거예요." 내가 바뀌지 않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일을 아주 조금은 늦출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게 참 어려운 일이다. 자존심을 지키며 산다는 것, 돈의 노예가 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가니와 무진시는 안개로 뒤덮인 이 세상의 축소판이다. 이 완강한 시스템은 온갖 거짓과 협잡과 폭력이라는 안개를 동원해 치부를 감추고 진실을 질식시키려 한다. 누구나 말할 수는 있다. 거짓과 싸워야 한다고, 진실을 영원히 은폐할 수는 없다고, 길을 잃어도 희망을 포기해선 안 된다고. 또 누구든지 폭력과 위선 앞에 분노하고 통한의 눈물을 흘릴 수는 있다. 하지만 정면으로 맞서 싸우고 온힘을 다해 무서운 폭력과 거짓이 세워놓은 안개감옥으로 뛰어들어 죽어가는 진실을 구해내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놀랍게도 작가 공지영이 이 일을 해냈다. 약자 중에 약자인 장애아들의 편에 서서 광란의 도가니를 뒤엎고 거짓된 시스템을 흔들어놓은 것이다. 그의 작업이 눈부신 것은 지옥과 같은 이 세상의 한복판에서 파헤친 진실의 두 손을 높이 들어 만인에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작가는 말한다. 한바탕 분노와 눈물로 끝내버리지 말고 진실을 끝까지 응시하라고, 중요한 것은 진실을 끝끝내 기억하는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희망을 살려내는 가장 튼튼한 뿌리라고. 우리가 가장 기본적인 가치로 믿어온 것들이 퇴보해가는 이 시대에 『도가니』는 아름답고 준열한 정신을 새롭게 일깨우는 수작이다“ - 박원순 (변호사,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옮겨온 글들) 오늘 아내와 함께 집근처에 있는 영화관에서 벼르고 벼르던 영화 ‘도가니’를 보았다. 소설과는 약간 다른 각색을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원작에 충실한 영화였다. 영화를 보는 동안 소설을 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몇 번이나 눈물을 닦아야했다.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저런 짓을 할 수가 있을까? 진실과 정의, 참된 가치는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하기나 하는 것일까? 가진 자들과 힘 있는 자들이 합작으로 펼치는 ‘법과 정의 깔아뭉개기’가 답답함과 함께 분노를 치솟게 하고 있었다. “제가 그곳 현지에 가서 취재하여 소설로 쓴 내용은 사실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소설보다 훨씬 심각했습니다. 어디 그 곳 뿐이겠습니까? 세상 참 너무 타락했고, 가슴 아픈 일들이 너무나 많이 일어나고 있지만, 진실이 밝혀지고 정의가 바로서기에 우리사회는 아직 너무나 암울한 것 같습니다.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보호가 절실하지만 현실은 너무 아닌 것 같습니다.” 지난해 작가 공지영이 소설 도가니를 발표한 후 어느 세미나에서 만났을 때 했던 말이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순간이기도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는 비슷한, 아니 어쩌면 훨씬 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영화를 보면서 지금 우리 사회가 얼마나 병들어 있는지, 또 사회와 종교계 지도층의 의식이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지, 더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자성해보는 시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직 영화 “도가니‘를 안 보신 분들에게 권하고 싶은 영화다. /홍익교회 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