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에 잠을 깨서 시계를 보니 아직 한밤중이었습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이곳 철원 모닝컴랜드 밤나무 숲에 마구 쏟아지는 빗소리는 마치 전쟁이 일어난 듯 요란스럽습니다. 슬레이트 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도 그렇고, 제법 큰 밤송이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밤나무 숲에 쏟아지는 빗소리 역시 거대한 파도소리처럼 다가와 잠을 깨워 버립니다. 그리고 물을 잔뜩 먹은 밤송이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가지가 찢어지고 땅에 닿을 듯 휘어져 있는 밤나무들 걱정이 잠을 멀리 쫓아버립니다. 휴가 중이니, 내일 딱히 해야 할 별일이 없으니 억지로 잠을 청할 필요도 없어서 가벼운 마음으로 책상에 앉아 휴가가 끝나고 해야 할 교회사역들을 하나님과 의논합니다.

 사실 휴가의 자유는 내일 해야 할 일을 위하여 잠을 청해야 하는 조바심으로부터, 수면 부족으로 인해 피곤한 바쁜 일상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휴가는 틀에 짠 듯이 시간에 매이고, 시간 때문에 부담스러워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에서의 자유입니다. 잠을 깨면 밤중에도 일어나 책을 읽고, 피곤하면 한낮에라도 쉴 수 있는 시간으로 부터의 자유, 시간이라는 속박으로부터의 자유가 휴가의 참 맛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휴가는 이제 곧 돌아갈 일터, 책상 위에 수북이 쌓여 나를 기다리는 일거리, 나를 필요로 하는 많은 사역들을 조용히 그리고 차근차근 진지하게 돌아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일이 부담이 아니라 기대가 되도록, 사명이 짐이 아니라 자랑스러움이 되도록, 빼곡히 기다리고 있는 바쁜 일정이 에너지가 되어 재창조의 긴장을 만드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능력,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교회,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이루실 새로운 역사를 생각하며 새로운 흥분으로 에너지가 축적되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나에게 돌아갈 일터, 섬길 교회, 사랑할 성도가 기다리고 있다는 묘한 설레임을 가지는 기회입니다. 그래서 이 깊은 밤을 누릴 수 있는 휴가는 나만의 시간이 아니라 나를 하나님께 마음껏 드리고 또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거할 수 있는 은총으로 풍성한 영적 충만을 누리는 시간입니다.

무엇보다 나의 기쁨은 나의 인생을, 나에게 주신 능력을, 나에게 주신 달란트를, 하나님을 위하여 드릴 수 있다는 엄청난 은총입니다. 내가 배운 학문이나 쌓은 경험이나 겪어온 성공과 실패, 가시밭길을 걸은 아픔의 시간들, 대로를 달리듯 달려온 승리의 시간들이 다 하나님께 드려질 달란트가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이 깊은 밤에 나 홀로 깨어 조금은 잦아진 가는 빗소리를 들으며 즐길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무엇보다 나의 삶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달란트를 하나님을 위하여 쓰는 삶이라는 것이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달란트가 있습니다. 머리로 하는 능력으로부터 손발로 하는 능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재능과 능력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 능력을 어디에 무엇을 위하여 사용하는가에 따라 그의 인생과 삶의 질(質)이 달라집니다. 어떤 이는 이기적 욕망을 위하여, 어떤 이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어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합니다. 남다른 재능을 자기를 위하여 극대화 하려고 동분서주하는 사람도 있고 금방 시들어 버릴 돈과 명예를 위하여 인생을 낭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이 가진 특별한 달란트가 마치 자신의 전유물(專有物)인줄 착각하여 자기만의 목적을 위하여 사용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래서 돈과 명예를 손에 잡고 그것이 성공인줄 착각하는 가짜 행복에 취해 버립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을 닮은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자로 이 땅에 사는 사람의 삶은 그에게 주어진 시간과 재능과 여건을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성공입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고 그래서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기보다는 그 재능을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하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이 더 지혜롭고 성공적인 삶입니다. 여러분의 달란트를 이제 하나님을 위해 쓰시기 바랍니다.

책을 읽어 더 깊은 학문적 깨달음을 갖는 것, 깊은 기도로 자신의 내면에 쌓인 추한 욕심을 털어 내는 것, 겸손히 말씀을 받아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순종하는 이 모든 노력들은 자아성취나 자신의 위상을 세우기 위한 발버둥이 아닙니다. 더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더 큰 힘을 소유하기 위한 헐떡임이 아닙니다. 더 온전하게 다듬어져 순전한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 되기 위함입니다.

이제 이 밤이 가고 날이 밝으면 내 삶의 현장을 행해 이 산을 내려갑니다. 탁한 공기만큼이나 숨 막히는 삶의 현장이지만 거기에 내가 섬길 교회가 있고, 내가 사랑하는 성도들이 있고, 내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이룰 하나님의 뜻이 있고, 거기에 세울 하나님의 나라가 있기에 기대와 기쁨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거기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다시 찾고, 해야 할 사역을 준비하고, 주시는 사역을 감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일상에서 삶으로 드릴 예배에 충실할 것입니다. 철원 모닝컴랜드, 이 밤나무 숲으로 쌓인 기도원에서 만난 하나님을 거기서 증거할 것입니다. 한밤중에 폭풍으로 밤나무 숲에 쏟아진 소나기처럼 강한 하나님의 위엄을 증거하고, 동트는 새벽에 조용히 밤나무 숲을 적시는 이슬비처럼 내 심령에 임한 하나님을 삶으로 증거할 것입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의 겸손한 종, 여러분을 위한 목자(牧者)로 돌아가겠습니다.

/신양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