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이 시를 지은 정지용 시인은 구한말인 1902년 6월 20일 충북 옥천군 옥천면 하계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옥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4세 어린 나이에 상경하여 17세에 휘문공립보통학교를 입학하여 졸업한 후, 일본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던 1929년에 ‘조선지광 65호'에 ‘향수'를 발표했다.

식민지 망국의 설움을 간직하고 유학을 떠난 젊은 시인이 낯선 외국 땅에서 잊혀지지 않는 내 조국과 고향을 그리워하며 애틋하게 써 내려간 시 ‘향수'. 그러기에 향수는 시인이 태어나고 열네살까지 자란 유년시절의 고향이 배경이 아니라 식민지하에서도 굳건히 지키고 이어나갈 내 나라의 평화로운 풍경이요, 어떠한 곤혹스러운 상처를 가슴에 안고서라도 반드시 이겨내야 할 내 민족의 애환을 목가적으로 의식한 젊은 시인이 시어(詩語) 속에 묻어있는 우리 말과 우리 것에 대한 사랑이기에 삼천리 금수강산 골골 모두가 향수의 배경인 것이다. 그렇게 예지의 기상이 번득이고 당돌했기에 가난의 고통과 고난의 혹독함을 이겨내며 망국의 설움을 안고 떠난 유학의 길에서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고향에 대한 애틋한 ‘향수'를 목놓아 부른 노래이기에 온 국민의 사랑을 받는 이유일 것이다.

언제부턴가 향수하면 테너 박인수 교수의 모습이 그려지며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언제 어느 곳에서 불러도 기분 좋은 우리의 노래이기도 때문이다. 특히 먼 이국땅에 살고 있거나 실향민들은 고향에 대한 아련한 회상과 애틋한 그리움이 담긴 노랫말이 가슴에 와 닿을 것이다. 어디 그 뿐이겠는가. 고향을 떠나 사는 사람은 누구나 한번쯤 흥얼거리며 따라 불렀을 노래이기도 하다.

/한국장로신문 사장, 조양교회 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