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와 동갑이었던 어느 연예인의 자살 소식에 마음이 무겁습니다. 늘 밝은 모습을 보여줬었는데 아무도 모르게 힘든 삶을 감내해왔더군요. 자살이라는 예민한 문제에 대한 판단은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니고요. 그저 내가 사는 세상이 그토록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곳이라는 게 슬펐고 남아있는 사람들이 짊어져야 할 마음의 짐들을 생각하니 더욱 가슴이 아플 뿐입니다. 연약한 우리 인간이란 존재는 무엇을 의지하고 무엇을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지 생각만 많아집니다.

그 연약함으로 슬며시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쉽게 약해지고 쉽게 포기하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선악과 사건으로 시작된 원시복음으로부터 시작하여 아브라함과의 약속, 시내산에서의 약속, 예수님의 피로 맺어준 약속 등등. 그것들은 결국 우리를 향한 사랑에 대한 약속, 구원에 대한 약속, 우리 모든 삶을 지켜주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나 불쌍한 인간들을 위로하기 위해 빈말로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태초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우리 삶에 간섭하고 계십니다. 세상이 더 악해져 갈수록 약속을 지키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오늘은 그 ‘약속’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약속’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고전소설 ‘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고등학교 3년을 보낸 사람이라면 반드시 배웠을 그 고전소설입니다. 한국문학사에서 최초의 소설로 인정받은 김시습의 소설 중에서 가장 뛰어난 문학성을 보이는 작품입니다. 간단히 줄거리를 말해보겠습니다.

어느 봄날, 이생은 우연히 어느 귀족 집 담장 안을 엿보다가 문득 최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은 서로 한눈에 반했지만 사랑을 이어나가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귀족 가문인 최랑과 가난한 사대부의 이생, 둘은 사회적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이 일은 눈치 챈 이생의 아버지는 출세를 통해 집안을 일으켜야 할 이생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먼 곳으로 쫓아버리게 됩니다. 이생이 멀리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최랑은 자리에 눕게 되고 이생과 결혼하게 해달라고 눈물로 호소합니다. 딸을 사랑하는 최랑의 부모는 결국 완강했던 이생의 아버지 마음을 돌리게 되고 결국 그들은 혼인을 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결혼 직후 나라 안에 홍건적이 침범해 와서 두 집안 가족들은 각기 사방으로 흩어지고 최랑은 끝내 정조를 지키다가 도적들의 손에 죽게 됩니다. 이생은 피난에서 돌아왔지만 집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죽은 아내가 그 집으로 이생을 만나러 찾아옵니다. 이생은 그녀가 이미 죽은 몸인 줄 알면서도 반가이 맞아 주었고 그 후 몇 년 동안 부부로 행복하게 지내게 됩니다. 어느 날 아내가 저승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며 울음을 터뜨리고는 사라져 버립니다. 아내의 부탁대로 유골을 거둬 장사를 지낸 이생도 그리움에 병을 얻어 몇 달 후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애통해하고 탄식하며 그들의 절개를 사모하였다고 합니다.

21세기에 사는 우리가 15세기 소설을 읽는다는 자체가 재미없고 따분하게 느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세기 동안 사라지지 않고 전해 내려오는 내용이라면 반드시 그 안에서 현대적인 의미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이생규장전 전체를 꿰뚫는 내용은 이생과 최 처녀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소설의 마지막부분에서 그것을 ‘절개’라고도 이야기합니다. ‘절개’라는 말이 고리타분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현대적인 의미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약속’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생과 최랑은 서로에게 사랑을 ‘약속’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부모의 반대, 즉 사회적인 편견에 부딪히지만 최랑의 고집으로 결국 그들은 그 모든 것을 뛰어 넘고 약속을 지켜 냅니다. 그런데 이제는 전쟁이 일어나 최랑이 죽게 되어 그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최랑은 그 죽음을 극복하고 다시 이생을 찾아옵니다. (고전소설을 보면 여자가 사랑을 지키는데 더 적극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돌아가야 할 운명 앞에서는 적극적인 최랑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부모의 반대, 사회적 편견, 전쟁이라는 참담한 현실과 죽음이라는 것까지 다 이겨낸 이들의 약속은, 결국 운명 앞에서는 어찌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생이 병들어 죽게 되면서 최랑의 뒤를 따릅니다. 이렇듯 개인의 사랑을 이렇게 힘들게 지킬 수밖에 없는 사회적 현실이 어쩌면 저리도 암담한지 한숨이 나올 지경이지만 그 가운데 그들이 맺은 사랑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더욱 두드러져 보입니다.

물론 귀신이 되어 돌아왔다든지 하는 비현실적이면서 비기독교적인 내용이 영 못 마땅하게 여기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그 기본 사상에 대한 이야기는 접어두기로 하겠습니다. 다른 것을 따지기 위함이 아니라 그 ‘약속’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이니까요.

김시습은 어려서 세종이 인정한 신동이었습니다. 학문적으로 탁월한 능력을 보인 천재 김시습, 그러나 그가 어른이 되었을 때 세상은 너무나 냉혹했습니다. 세조는 조카를 밀어내고 왕위를 차지했고, 세종에게, 문종에게 충성을 다짐했던 많은 신하들은 단종에게 등을 돌리고 세조의 편에 붙고 말았습니다. 이전 왕들에게 절개를 지키려했던 충직한 신하들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고 절개보다 현실적 명분을 택했던 신하들은 출세라는 탄탄대로를 걷게 됩니다. 이런 모순이 횡행하는 세상에서 그 ‘절개’라는 것은 그저 고리타분하고 답답한 이야기가 아니라 김시습에게는 가슴 깊이 사무친 한이었던 겁니다. 그는 세상을 부끄럽게 여기며 스스로 미치광이 행세를 합니다. 미치광이라도 되지 않으면 이와 같은 현실을 이겨낼 수가 없었던 거죠. (세조에 대한 다양한 역사적 평가 역시 일단 접어두겠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김시습은 이생규장전을 썼습니다. 현대적 의미의 ‘절개’는 곧 ‘약속’이라고 말했었죠? 김시습은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버린 사람들에게 ‘약속’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이며(비현실적인 상황이 아니고서는 결코 극복해내기 힘든 상황이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약속을 지켜낸 사람들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겁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15세기나 21세기나 늘 똑같이 시끄럽고 정신이 없습니다. 속이고 속는 사람들도 너무 많고요. 쫓아가는 사람과 쫓기는 사람, 시비 거는 사람, 싸우는 사람, 경쟁하는 사람, 낙오하는 사람...... 여유도 없이 뒤돌아볼 틈도 없이 그렇게 떠밀려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가운데 ‘약속’을 지키기 위해 비장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오히려 약속을 꼭 지켜야만 하는 상황을 숨 막히고 답답하게만 여기고 있지는 않나요. 약속을 지키려는 것보다 상황에 맞춰 변화하는 것이 오히려 미덕인 세상이 되었으니 깊이와 무게가 있는 언행을 찾아보기가 힘든 시대가 되었습니다. 약속을 지키려는 노력이 없으니 누구도 그 약속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신용이라는 것은 그저 돈을 빌리고 갚는 일에만 사용되는 단어처럼 보일 뿐이고 국민들과 공적으로 하는 약속인 ‘공약(公約)’은 결국 ‘공약(空約)’일 뿐이라는 씁쓸한 말장난만 떠오릅니다.

문제는 '약속을 꼭 지킬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유연함', '양보', '변화'와 같은 말로 포장되어 우리의 믿음의 태도를 야금야금 바꿔놓지는 않는가 하는 점입니다. 세상에서는 집사, 장로를 사탕발림과 말바꾸기의 전문가처럼 취급하고 있고, 교회는 온갖 비리의 온상지처럼 인식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넘치는 불신이 교회 안으로 밀려 들어왔고, 세상이 교회를, 교회와 교인이 서로를 불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악의 고리가 너무나 질겨 무섭기까지 합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온갖 참담한 현실을 다 견뎌낸 이생과 최랑의 사랑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시대를 바라보는 김시습의 안타까움인 것입니다. 같은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약속을 지키고 서로 신뢰하는 세상을 위해서 말입니다.

월간 'ccmer' 10월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 고교 국어교사, 삼일교회 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