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6:21-25)
 
1.
어느 절에서 스님들이 중요한 사안을 놓고 난상토론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것저것 의견들이 다 쏟아져 나왔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 가였습니다. 그러자 한 스님이 침통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소승이 십자가를 지겠나이다.”
 
여러분, 스님도 십자가를 진답니다. 여러분은 십자가를 지고 있는가요? 사순절, 우리의 십자가를 지자. 기도의 십자가, 섬김의 십자가, 용서의 십자가, 십자가를 지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가 져야 하는 자기 십자가를 집시다.
 
그런데 ‘십자가!’하면 무슨 생각이 먼저 드는가요? ‘내가 십자가를 지겠습니다’하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요? 고통, 아픔, 괴로움, 억울함, 희생, ... 이런 부정적이고 어두운 것들이 생각납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정말 우리에게 이렇게 부정적인 것인가요?
 
2.
예수님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 이에 베드로가 나서서 고백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기막힌 정답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베드로를 축복하셨고, 이제는 이들에게 진실을 알려줄 때가 되었다 싶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이때로부터’란 올바른 신앙 고백이 나온 이후라는 뜻입니다. 이때부터 비로소 예수님은 제자들이 성숙했겠다 싶어서인지 당신이 장차 예루살렘에 올라가 핍박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실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비로소 나타내시니’라는 표현으로 보아 얼마나 이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는지 모른다는 예수님의 심정이 보입니다. 이것저것 다 말해주고, 보여주고 했지만, 정작 그들에게 알려주고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것은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의미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뜻밖의 반응을 보여줍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 하리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 놀라운 고백을 하여 축복까지 받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합니다. 이 장면에는 우리 한글 성경에는 드러나지 않은 아주 놀라운 모습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에서 ‘붙들고’라는 단어가 ‘자기 곁으로 끌어당긴다’는 의미의 단어인‘프로스람바노’입니다. 베드로가 신중하게 십자가의 길을 이야기하시는 예수님을 자기 방향으로 잡아끌었다는 의미입니다. 왜? 잘 들으려고? 아닙니다.
 
이어지는 단어, ‘항변하여’라는 단어는 ‘에피티마’라는 헬라어입니다. 그 뜻이 ‘책망하다, 야단치다’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엄숙히 십자가의 길을 예고하시자, 베드로가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더니, 주님을 향해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야단을 쳤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장면이죠? 베드로가 예수님을 야단 쳤답니다! 왜 그랬을까요?
 
여기에 십자가에 대한 베드로의 인식이 보입니다. 십자가는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마이너스였습니다. 부정적인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앗아가는, 결코 자신들에게 일어나서는 안 되는 그런 성질의 것이었습니다. 자기들에게는 평생 수고한 대가로 축복이 더해지고, 출세가 더해지고, 재물이 더해지고, 권력이 더해져야지 모든 것을 잃는 마이너스의 십자가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얼굴이 단번에 바뀌었습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그 인자한 예수님의 얼굴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곤 베드로를 향해 정면으로 돌이키사, 이젠 예수님이 베드로를 향하여 ‘에피티마’, 베드로가 주님을 향해 썼던 그 단어를 쓰셨습니다. 책망하십니다. 뭐라고요? ‘사탄아!’
 
여러분, 충성스러운 제자와 사탄과는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멋진 말을 하고, 훌륭한 고백을 했다고 해서 그가 늘 천사인 것은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한, 그는 단번에 사탄이 되고 맙니다.
 
한때 충성했다고, 한때 천사였다고 언제나 자신이 충신이고 천사인줄 압니다. 하나님의 일보다도 자신의 욕망과 고집을 추구하여 사탄이 되었음에도 이 사실조차 모르고 회개할 줄 모르는 이들이 있습니다. 베드로 같은 이들이 있습니다.
 
보십시오, 이렇게까지 무섭게 말씀하신 예수님, 이제 제자들에게 아주 엄한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너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그가 목사든, 장로든, 집사든, 권사든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라가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
 
3.
십자가에 대한 일반적 생각은 예수님이나 제자들에게나 공통적인 것입니다. 힘들다는 것입니다.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려운, 힘든 십자가를 대하는 자세는 예수님의 시각과 베드로의 시각이 다릅니다. 예수님의 시각은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절대 사명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는 그것은 단순히 인간적인 고통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어리석은 짓이었습니다.
 
왜 그런가요? 아직 베드로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예수를 따르면서도 아직 그의 수준은 인간적 수준, 육신적 수준입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 8:5-8)
 
예수님에게 십자가는 사명이요 사랑이었습니다. 육신적으로 볼 때 그것은 고통스러운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이거 안 지면 안 되느냐고 겟세마네에서 밤새 기도하실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신 일입니다. 그러기에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기에 기꺼이 자원하여 그 길을 가십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시옵소서 하고 결단하고 나아갑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18:11b) 하십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억지로 지신 것이 아닙니다. 힘이 없어서 그 길을 가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주님은 늘 행하셨습니다. 그것이 비록 십자가의 고통스러운 길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기꺼이 행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데 어찌 외면할 것인가요! “나는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라는 말이 있듯이, 주님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기에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기꺼이 십자가에 매달리셨고, 거기에 당신의 생명을 내던졌습니다.
 
이를 암시하는 말씀이 요10:18에 이렇게 선포되어 있습니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십자가 위에서 생명을 버리심은 어쩔 수 없이, 힘이 달려서 그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셔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 당신이 스스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언젠가 서울 홍제동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소방대원 6명이 화재 진압 중 순직한 일이 있습니다. 그때, 그 순직한 소방대원이 남긴 글 중에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을 이렇게 표현한 글이 있습니다. “내 직업이 최고로 좋은 직업이다. 의사의 역할은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일임에 틀림없지만 자신을 내던지며 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의 직업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내 목숨을 내던질 수도 있다.”
 
용기 있는 이들입니다. 사람을 구하고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내던질 수 있다는 이들은 정말 용기 있는 사람들입니다.
 
엊그제 뉴스에 보니 지난 26일 미국 뉴욕 퀸즈의 한 피자가게 앞에서 61세의 한국 여성이 2인조 강도의 흉기에 등을 찔리는 것을 보고 피자가게의 주인 68세의 아버지와 38세의 아들이 그 위험한 상황에서도 무려 9차례의 칼에 찔리면서도 자기 몸을 던져 여성을 구해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닮은 이들입니다. 스스로 나선 것이요, 스스로 던진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 십자가에서 죽음은 예수님께서 스스로 택하신 길입니다. 왜?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 스스로 택한 일입니다.
 
4.
그런데 왜 우리들에게는 십자가가 고통스럽다고만 여겨질까요? 왜 그것은 가급적 피하고 싶은 것이고, 애써 언급하고 싶지 않은 것인가요?
 
우리에게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만 있다면 그것은 능히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기에 그 모든 것들이 고통스럽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만 받으려고 했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에 그 하나님의 말씀들이 부담스럽고, 힘들어 보입니다.
 
부부싸움하고 나면 설거지 소리가 엄청나게 요란하답니다. 그러나 부부에게 사랑이 넘치면 설거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사랑 없이 행할 때 모든 게 지긋지긋합니다. 고통스럽습니다. 귀찮기 짝이 없습니다.
 
지금은 세탁기가 있어서 다 빨래를 해주지만, 세탁기가 나오기 전에는 모두 손으로 빨래를 했습니다. 빨래판에 빨래를 비비고, 방망이로 두드리며 빨았습니다. 그 시절에 어느 선생님이 한번은 사모님과 대판 싸움을 하고 며칠 동안 말도 안 하고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아침에 출근하려고 빨래해서 걸어놓은 와이셔츠를 입으려고 보니까 와이셔츠가 여기저기 해어지고 찢어지고, 더러는 구멍이 나 있더랍니다.
 
그 선생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장가가서, 절대로 빨래를 쌓아두고 부부 싸움하지 마라. 그랬다가는 입을 옷 하나도 없다.” 빨래거리를 쌓아두고 부부싸움을 하면 남편의 옷은 여기저기 다 빵구가 난답니다. 사랑이 없기에 그런 겁니다.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이 고통입니다. 남편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뭔가를 해주어야 한다는 것, 고통입니다. 아내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해야 한다는 것, 고통입니다. 가족을 사랑하지 않으며 돈 벌어야 하는 것, 정말 하기 싫은 일입니다. 처자식에 얽매인 자신이 불쌍해 보일 뿐입니다. 사랑 없이는 모든 게 형벌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다면 십자가는 고통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내 생애 만큼은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한다면, 가족을 사랑한다면 그 일들은 오히려 즐거운 일입니다. 기꺼이 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랑이 충만하여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이상한 사람 아닌가요? 괴로움을 기뻐하고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운다니? 모두가 피하고 싶은 고난을 그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기꺼이 받겠다고 고백합니다. 왜? 그만한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주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5.
사랑이 있으면 십자가는 가볍습니다. 요즘 믿음의 삶이, 경건의 삶이, 성도로서의 삶이 힘들고 버거운가요? 코로나가 무서워서 가 아니라 사랑이 메말랐기에 그러할 것입니다. 사랑을 회복합시다. 그것도 첫사랑을 회복합시다.
 
분명한 것은 십자가는 예수님에게도 부담스러운 거였습니다. 룰룰랄랄 하며 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안 지면 안 됩니까, 피할 길은 없는 겁니까 하며 애태우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마침내 십자가를 지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크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 역시 크셨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고 사는 가는 얼마나 벅찬 십자가를 잘 지고 가느냐에서 보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데... 내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데... 하는 이들은 십자가를 즐겁게 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너무 편하고 안일한 것만 찾는 것은 아닌가요? 우리의 십자가는 너무 추상화되었습니다. 현실성이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다가오면 다들 회피하려고 합니다. 힘들다고, 부담스럽다고, 귀찮다고, 두렵다고, ...
 
아닙니다, 십자가는 사랑입니다. 사랑만 있으면 쉽게 지고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0)
 
사는 게 너무 힘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라 하십니다. 쉬게 하신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멍에를 메라 하십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메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가벼워진답니다. 그러면 쉴 수 있답니다. 우리는 멍에를 벗겨 달라고 기도하는데, 십자가를 안 지게 해달라고, 피하게 해 달라고 하는데 주님은 아니라고, 멍에를 지라고,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 비결은? 사랑으로! 사랑만 있으면, 사랑이 충만하면 멍에도, 십자가도 가벼워집니다.
 
6.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는 사랑입니다. 거기엔 우리를 향한 헤아릴 수 없는 크나큰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거기엔 말할 수 없는 예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엔 그 사랑에 감격하여 눈물 쏟으며 헌신하는 성도의 사랑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하나님의 사랑이 더욱 풍성해지고,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사랑도 더욱 풍성해져서 기꺼이 예수님의 제자로 즐거이 십자가 지고 승리하는 강한 사순절의 성도가 되기를!

/왕십리중앙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