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과 독재가 사라진 세상에서 ‘가스라이팅’이 남았다. 대중의 평균 학력이 높아지고 기본권에 대한 인식이 확대되면서 이제 더 이상 힘으로 사람을 지배할 수 없게 되며 말이다. ‘가스라이팅’은 권력 즉 무기와 자본이 필요 없다. 인간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면 그만이다. 스스로 ‘잘못됐다’라고 자각하기 전까지는 자발스럽고 열정적으로 동조한다.

사실 내가 가스라이팅이라는 말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인천 모 교회 목사가 미성년 여성 교인들을 정신적 노예 상태로 만들어 성폭행한 사건 때문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위력이 없어 보이는 이성간 연애이지만 가해자가 종교 지도자가 아니면 가능하지 않을 범죄이기에 이는 ‘그루밍 성폭력’으로 규정된다. (그루밍과 가스라이팅은 다르다고 하나, 상대를 심리적으로 지배를 한다는 면에서는 일맥상통한다) 법원도 인정해 그에게 징역 5년 형을 선고했다.

가스라이팅의 진정한 폐해는 가해자가 선의를 버리고 마각을 드러낸 이후이다. 이러면 (피해자가) 오류를 자각하지도 못한 채 매몰되는 경우 또는 각성했지만 빠져나올 도리가 없어 계속 가담하는 상태 둘 중 하나가 된다. 그래서 무섭다. 서서히 끓는 물에 개구리가 익혀 죽듯 ‘가스라이팅’은 한 영혼을 자기도 모르게 파괴하는 것이다.

이것이 비단 사이비 교주에게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이른바 셀럽 또는 인플루언서라고 불리는 이들 주변에서도 발견된다. 한 발짝 떨어져 보면 누가 봐도 터무니없는 주장임에도, 자신의 인기와 명망으로 이를 진실로 세뇌하는 이들이 유튜버 중에 있다. 처음에는 지지와 성원 차원에서 시작된 믿음이리라. 그러나 사안별 일체감을 가졌던 것이 진영적 일체감으로 왜곡 변질한다. 그래서 그 지지와 성원이, 대척점에 선 사람들에 대한 배척과 비방으로 오도된다.

‘똑똑한 소비자’가 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이 원칙들이 아닐까 한다. ▲ 선과 악, 의와 불의를 판단할 최종적이고 고유한 권한이 나에게 있다. ▲ 남의 경험과 이력, 학식은 다른 맥락과 형식으로 나에게도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다. ▲ 누구나 오판할 수 있고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 신뢰하는 상대의 심정적 물질적 토대가 탄탄해지면 그가 권력화 사유화의 유혹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 결정적으로 ▲ ‘나의 옳음’이 내가 부정하고 싶은 ‘진리’ 앞에 무릎 꿇어야 할 때 용기를 낼 줄 알아야 한다.

사랑을 우선된 계명으로 한 기독교의 분파 가톨릭(구교)과 위그노(신교)가 15세기 무수한 전쟁을 벌였다. 이 시대에 살았던 프랑스 철학자 미셸 드 몽테뉴는 사람이 죽고 다치고 미워하는 행태가 ‘진리’라는 이름으로 합리화된 현실에 깊은 절망감을 느낀다. 몽테뉴가 여기서 길어낸 성찰의 우물이 있다. “진리라면 비록 꺼려지는 자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존중한다고 단언한다. 그는 교만하지 않고, 반박당하는 것을 모욕으로 여기지 않고, 틀렸을 때 교정되는 것을 기뻐한다”(앙투안 콩파뇽 ‘인생의 맛’에서 재인용)라는 것.

인간이 한계에 봉착해 고통과 두려움을 극복하려 절대자에 의지하려 한다. 이게 종교이다. 그런데 욕망을 충족하지 못하거나, 혹은 또 다른 고통과 두려움의 근원이 되면 다음은 ‘가스라이팅’에 주도권이 넘어간다. 여기에 무슨 교당과 신도, 시스템이 필요한가? 종교의 대체재는 얼마든지 손쉽게 만들어지는 시대이다. 요즘 초등학생 장래 희망 1위가 유튜버이다. 스마트폰 하나로 세상을 호령하는 시대, ‘가스라이팅’ 앞에서 수용자만이 아니라 운영자 즉 크리에이터도 매우 깊이 반성해야 할 대목은 아닐는지. 최근 법과 상식을 우습게 여기고, 지지자의 지지와 후원금만 믿고 세상을 농락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서 하는 이야기이다.

/평화나무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