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스펙은 ‘specification’라는 말의 약지지? 직장을 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학력, 학점, 토익 점수 따위를 합한 것으로 통하는 말이다.

기획재정부와 통계청 자료를 뒤져보니까, 작년 3분기 20대에서 30대 취업자가 18년 만의 최저 수준이라고 한 내용이 있다. 이 가운데 놀라운 사실이 있다. 낙방한 사람들 중에는, 심지어 토익 900점을 받고, 2년 동안 해외연수를 다녀오고 또 대기업에서 인턴을 거친 학생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 사람들은 비교적 눈높이를 높여서 대기업․공기업 또는 공공기관에 도전한 사람들인데. 토익 900에 2년 해외 연수 정도도 안 먹힌다는 점은 놀랍게 느껴지지 않나. 따져보자. 이보다 더 나은 스펙을 갖춰야 취업할 수 있다는 얘기일까. 아니면 관점을 달리해서, 스펙이 아닌 다른 면에 당락이 좌우됐다는 것일까.

고등학교 때에는 사교육 비용, 대학에 와서는 취업을 위한 스펙 쌓기 비용이 필요한 현실이 안타깝다. 한국고용정보원이 내놓은 2008년 대학생 직업선호 실태조사를 보면, 취업준비생이 스펙을 위해 1인당 얼마를 지출하는지 나와 있는 내용이 있다. 월평균 28만 원이라고 한다. 반 년 취업 준비하면 168만 원이 든다는 얘기이다. 당연히 가계에 부담이 줄 만한 규모이다. 비용뿐인가. 스펙 열품은 정신적인 부분에서도 취업 준비생들을 압박하고 있다. 스펙 열풍이 신드롬을 넘어 사회 병리적 현상으로까지 해석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스펙 쌓기 움직임은 직장인들 사이에서도 목격할 수 있는 현상이다. 직장인들에게 스펙은 어떤 의미일까. 승진을 위한 필수 조건으로 꼽힌다. 또 구조조정 바람이 일 때 자기만은 예외로 만들 수 있는 하나의 방패막으로도 인식된다. 그래서 일과 시간 마친 다음에, 영어 학원 다니는 직장인들이 꽤 있다.

그런데 이런 스펙은 ‘그 직장인의 자기 관리 의지가 어느 정도인가’를 판별하는 기준일 뿐, 능력의 유무를 따질 수 있는 기준으로써는 효용성이 떨어진다는 평가가 점점 증폭되고 있다. 한 인사 취업 포털 사이트가 직장인 1500여명을 대상으로 지난 해 연말에 조사한 내용이 있다. '업무나 조직생활에 필요 없는 스펙이 있나'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1000명 넘는 응답자, 죽 68%가까이가 '그렇다'고 답했다고 한다. 가장 불필요한 스펙 1위는 공인어학시험 점수였다고 한다.

사실 회사도 스펙이 많은 직장인들을 선호하지 않는 흐름이다. 이런 통계가 있다. 직장인 10명 가운데 6명이 이직을 고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연공서열보다는 기술력에 따라 대우가 달라지는 IT업계에서 특히 심하다고 한다. 사례가 있다. 국내 1위 포털사이트를 운영하는 한 회사는 최근에 경력 직원 채용 공고를 냈다고 한다. 그런데 130명 뽑겠다는 자리에 무려 2만 명이 몰렸다고 한다. 문제는 이렇게 이직한 사람들이 언제든 또 이직을 꿈꾼다는 점이다. 본인의 스펙만 믿고 실무능력에서 열의를 보이지 않으면서도 과다한 연봉을 요구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이런 현실에 회사가 넌더리를 낸다는 것이고.

결국 한동안 맹위를 떨쳐온 스펙 신화에도 거품이 빠지고 있다는 얘기이다. 이런 가운데 최근 흥미로운 통계가 나왔다. 한 취업·인사포털 사이트가 올해 졸업생들 가운데 입사지원을 했던 구직자 중 취업에 성공한 402명과 아직 취업하지 못한 583명해서 총 985명을 대상으로 이들의 스펙을 살펴보고, 지난해 같은 조사결과와 비교해봤다. 학점 서로 비슷했다. 토익성적도 비슷했다. 인턴경험과 공모전, 각종대회 입상 경력도 별 차이가 없었다. 스펙의 여부가 취업자와 미취업자를 구분 짓는 요소로 작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스펙을 쌓으나 마나라는 것이다. 직장인의 경우도 그렇지만, 취업자들도 스펙을 제 때에 활용할 일이 없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도리어 스펙 쌓느라 실무능력 개발에 소홀했던 취업 준비생들을 직무에 적응시키기 위해 기업이 시간과 비용을 또 다시 들여야 하는 낭비도 발생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수많은 학생들은 학원으로, 해외로, 인턴 현장으로 달려가고 있는 현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런 심리를 사회 구조적으로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지금 전 세계는 총체적 불확실성의 시대에 갇혀 있다. 세계 일류 금융그룹은 물론이고, 자동차 빅3 업체가 생존이냐 파산이냐를 놓고 백척간두에 서 있다. 미국은 물론 유럽, 중국, 일본까지 거센 경제 한파 때문에 기댈 곳을 찾기 힘들 지경이다. 사람들은 좋은 학교 졸업장이 직업을 담보해주지 않고, 가진 돈도 언제 반 토막 날지 모르는 현실에 주목하게 된다. 이미 직장에 들어갔어도 얼마나 더 다닐 수 있을지, 월급은 제때 나올지 고민이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자기 능력, 자기 성격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자기 능력, 자기 성격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뭘까. 불안한 사회는 점점 사람들이 ‘자신’에게 집중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다시 얘기해, 불안해진 사회에서 자기 능력에만 기대게 만드는 현상을 부른다는 것이다. 몇몇 학자들은 이걸 어려운 말로 ‘신자유주의의 내면화’라고 규정한다. 그러다보니 ‘어떻게 해야 내가 경쟁력이 있을까’에 주목하게 되고, 결국 스펙 쌓기에 혈안이 돼 있는 것이다.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라기보다 살기위한 방편으로, 마음의 안도감을 주기 위해 스펙 쌓기에 나서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이게 지나쳐서 강박증으로 비화되는 경우도 있다. 사실 강박증을 한 꺼풀 벗겨보면, 자아존중감이 얼마나 있는지와 직결돼 있다. 한 연구에 따르면 낮은 자아 존중감을 가진 사람이 높은 자아 존중감을 가진 사람들보다 정신질환의 심리적 징후가 8배나 된다고 했다. 자아 존중감이란 내가 소중한 사람이라는 자각이고 정신건강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다. 계속되는 취업 실패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고 주변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게 되면 자신을 폄하하고 질책하며 자아 존중감 또한 낮아질 수 있다. 이런 현상을 막기 위한 자구책으로 스펙 쌓기에 몰두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패가 거듭된다면? 큰일이다.

이른바 ‘생계형 스펙 쌓기’, 불확실성 시대의 단면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 같다. 냉정한 자기 진단, 바른 능력 쌓기 무엇보다 건강한 자아 존중감이 필요한 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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