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표팀에게 4-1로 패한 일본이 어제 쿠바와의 패자부활전에서 5-0으로 승리했다. 2승을 거둔 일본팀은 4강 진출이 확정됐고 오늘 4번째 한일전이 펼쳐지게 된다.

어떻게 한 대회에서 같은 팀을 네 번이나 만날 수 있을까. 세상에 이런 대회가 다 있나 싶을 정도이다. 혹시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측이 ‘한일전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이런 심산으로 대진표를 짠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정말 영리하다는 평가를 듣게 될 것이다. 실제 그런 모양이다. 한국프로야구위원회(KBO)의 관계자는 “일본과 여러 번 맞붙는 식의 대진은 삼가 달라”고 요구했지만 묵살당한 것이다. TV 중계권료 또 관중 입장 수입을 생각하면 한일전만한 흥행작이 없다는 것이다. ‘한일전에서만은 꼭 이겨야 한다’는 우리 또 일본의 심리를 자극한 것이니까.

왜 우리는 일본을 꼭 이겨야 할까. 2009년 대회 2라운드 3차전 경기가 끝난 다음, 우리팀 선수들 일부가 승리 뒤에 또 마운드에 태극기가 꽂았다. ‘스포츠 내셔널리즘’ 논란을 촉발시킨 2006년의 그 퍼포먼스가 2009년 재현된 것이다. 이것 때문에 일본 선수들이 매우 분개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일본의 ‘스포츠호치’라는 신문과 인터뷰한 이와무라의 말을 인용해보겠다. “솔직히 좋은 기분은 아니다. 하지만 지난 대회에서 한국이 이런 퍼포먼스를 해준 덕택에 우승할 수 있었다. 마지막에 한국과 대결을 펼치고 싶다는 기분으로 쿠바 전을 이길 것”이라고 전했다. 일본은 약속대로 쿠바와의 준결승 진출 경기에서 승리했다. 사실 일본은 지난 3년 전에 한국선수들의 태극기 퍼포먼스에 자극받아 4강전에서 한국을 6-0으로 꺾고 결승에 진출해, 우승을 차지한 바 있다는 평가를 많이 받았다. 그래서 인터넷 게시판에는 “우승한 다음에 꽂는 게 낫지 않았겠느냐” 이런 의견도 있었다.

사실 원인 제공은 일본 선수 이치로가 했다. “앞으로 30년 동안 한국 야구가 일본을 이기지 못하도록 해 주겠다”라는 발언을 한 것이다. 그 뒤에 우리는 투지를 발휘해 보란 듯이 승리했다. 그래서 이번 WBC에서 이치로가 상당히 말조심을 했다는 후문이 있다. 또 일본팀 내에서는 “쓸데없이 상대를 자극해서 좋을 것이 없다. 침묵하자”라는 분위기가 형성됐다고 한다. 지략의 대가 김인식 감독 역시 “일본이 우리보다 한수위라며 일본팀의 승부욕에 물을 타고 있다. 양팀 모두 한일전에서 자존심이 미치는 변수가 매우 크다는 점을 깊이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한일전에 대한 관심은 선수 당사자 뿐 아니다. 각 나라 국민의 열다른 나라와의 게임은 시들하지만 일본전만은 관심이 대단하다. 작년 베이징 올림픽 야구 시청률을 보자. 네덜란드와의 경기 시청률 11.3%였다. 6전 전승의 대기록을 세웠던 쿠바전 시청률은 14.6%였다. 4강을 확정지었던 대만과의 경기는 13.6%였다. 그러나 일본과의 예선 경기 시청률은 20.5%. 순간 최고 시청률은 43.2%였다. 그러나 한일전에 관한한 일본의 시청률은 우리보다 더 높다. 이번 WBC대회 4강 확정을 지었던 당시의 경기. 경기 내내 우리가 끌고 갔건만, 우리 시청률은 21%였다. 하지만 일본은 40%였다고 한다. 일본도 한일전에 대해서만은 아주 특별한 관심을 갖고 이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스포츠 애국주의 이야기를 다시 안 할 수 없게 되는데, 일본과의 경기에 우리 국민들이 뜨거운 관심을 보이는 이유, 어떻게 해석할까. 일본의 한 신문이 지난 2006년 마운드에 태극기를 꽂은 퍼포먼스가 연출될 때 “한국에게 있어서, 일본을 상대로 한 승리는, 스포츠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라고 풀이했다. 비슷한 해석으로 이런 게 있다. ‘과거의 치욕적인 역사에 대한 보상심리가 발동한 것으로 봐야 한다’라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의 역사에 대한 충분한 배상을 하지 않은 일본이다. 이런 일본이 다시 동북아시아의 중심으로 부상하기 위해 군사 대국화를 꾀할 움직임, 이런 움직임에 발맞춰 우익들이 망언을 쏟아내는 현실이다. 그러다보니 그 시대를 경험해보지 못한 이들이 더 많은 오늘날인데도 한일전에 대한 뜨거운 관심이 여전하다는 것이다.

한국이 일본과 맞서기만 하면 강한 승부욕을 나타내서일까. 일본도 한국을 만나서는 투지를 잃지 않는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부분이 있다. 한일전에 직면하면 일본 언론은 ‘사무라이 정신’을 많이 언급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국가대표 선수들을 태극전사라고 하듯, 일본은 일본 나름대로 ‘사무라이 정신’을 강조하는 것,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사무라이 정신’의 요체는, 불명예를 입거나 패배를 당했을 경우에는 할복 자살을 택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생결단으로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물러섬은 곧 죽음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강한 압박이 있는 것이다. 무시무시하다. 일본 ‘석간 후지’라는 신문은 “이치로가 (부진의) 터널을 통과하지 못한 채 대회 2회 연속 우승을 놓치게 되면 이치로는 ‘전범’이 되는 것이 틀림없다”고까지 했다. 한일전에서 부진했다고 ‘전범’이란 말까지 꺼내다니, 좀 과하지? 일본의 정서가 이렇다.

‘2등보다 더 힘든 이들은, 정상의 자리를 지켜야 하는 1등’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누차 말한다만 일본 야구 수준은, 또 인프라는, 우리가 도저히 따라잡기 힘든 정도로 앞서 있다. 따라서 일본이 객관적으로 우리보다 야구 실력이 낫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다보니 일본에게 큰 스트레스가 된다. 선수 연봉 다 합쳐 17배나 되는 선수들이, 한국에게 연패한다는 것은 씻을 수 없는 모멸감이다. 게다가 한국이 이 승리에 '독도는 우리땅임을 입증했다'라며 정치적 의미까지 부여하는 현실은 일본의 심사를 더욱 뒤틀리게 하는 측면이 있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한일전 승리는 매번 그네들로서는 자존심을 건 일전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러다보니 스포츠가 친선의 장이 아닌, 자존심 대결의 장이 된다. 물론 스포츠가 국가와 국가 사이에 투쟁의식을 합리적인 틀 안에서 해소할 수 있게 해준다는 측면에서 상당히 긍정적인 면이 있다. 그러나 한일전은 다르다. 경기에서 졌을 때, 그 후유증은 매우 크다. 설욕에 대한 욕구가 더욱 커진다. 반면에 이겼을 경우, 스포츠 경기는 언제나 한 편의 극적인 드라마다. ‘정벌’, ‘침몰’, ‘격침’, ‘완파’ 한일전이 승리로 끝나면 이런 단어들이 거침없이 쏟아지고, 이 단어를 접하게 되는, 이긴쪽의 느낌도 ‘통쾌함’ 그 자체이다. 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스포츠가 세계 평화에 기여하기 보다는 틈을 더 벌려놓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올만하다. 한일전의 양상이 언제나 민족주의와 결합돼 정치적 의미로까지 확산 재생산되는 현실. 애청자 여러분은 어떤 판단을 하시게 되나. 냉정과 열정 사이. 여기서 위치 잡기가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