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 지식인들의 연판장 참여를 촉발시킨 프랑스 소설가 에밀 졸라

서울지법과 남부지법에서 5월 14일 판사회의를 열었다. 그밖에 각 지방법원에 속한 소장 판사들도 회의를 소집할 움직임을 나타내고 있다. 재판에 개입한 것으로 드러난 신영철 대법관 문제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제 5의 사법파동을 우려하는 시각이 많아지고 있다. 사실 사법파동에도 순서가 있다. 우선 판사 회의가 열린다. 그런 다음 뜻을 모은다. 의견이 모아지면 구체적인 행동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 첫 번째 수순은 대체로 ‘결의문’ 만들기의 형태이다. 그 다음 단계가 바로 연판장 돌리는 것이다. 지금 소문을 들어보면, 판사들은 연판장까지 돌리는 상황에 이르러서도 신영철 대법관이 꿈쩍도 안 한다면, 그때 집단 사표를 내는 극단적인 카드를 꺼낼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법파동을 상징하는 단어는 ‘판사 회의’만 있는 게 아니다. ‘연판장’도 있다. 연판장이라 함은 특정한 의견이나 주장을 표명하기 위하여 여러 사람이 연명으로 작성한 문서를 말한다. 서약서나 청원서가 대표적이다. 연판의 방법은 각자의 성명을 적고 도장 또는 지장을 찍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보다 강력한 의도를 나타내기 위하여 손가락에 흠집을 내서 피로써 서명을 대신하는 혈판장을 작성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런 행위는 일반인들 사이에선 매우 보편적인 것 아닌가? 그런데 판사들이 이러면 왜 이렇게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일까? 고도의 권위와 질서를 요구하는 조직이 법원이다. 그런데 하급 판사가 수뇌부를 상대로 압박한다는 점은 대단히 이례적이다. 자칫 큰 후폭풍을 부를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뉴스가 되는 것이다.

집단 사표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데, 지금까지 모두 네 번에 걸친 사법 파동이 있었지? 판사들이 단체로 사직서를 낸 때는 유일하게도 1971년 한 번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법원이 당시 시국 사범에 대해 잇달아 무죄를 판결했다. 검찰이 매우 화가 났을 것이다. 때마침 검찰이 특정 판사의 개인비리를 조사해 구속영장을 청구하는 일이 발생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난다 했다. 판사 150여명이 집단사표를 제출했던 것이다. 결국 영장을 청구한 검사는 문책됐다. 사건이 일단락 됐던 것이다. 사법 파동의 여파, 대단했던 것이다.

연판장으로 해결된 때도 있었다. 3차, 4차 사법 파동 때였다. 3차 사법파동은 문민정부 시절인 1993년에 있었다. 소장 판사들이 사법부 개혁을 요구했는데 법원 지휘부가 미온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이때 화가 난 소장 판사 40여명이 건의문을 냈다. 이 사태는 김덕주 대법원장의 사퇴로 마무리됐다. 4차 사법파동은 참여정부가 시작하자마자 발생했다. 최종영 당시 대법원장이 기수와 서열 위주의 대법관 인사를 단행하니까 소장 판사들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이러면서 연판장을 돌리며 사태를 주도했다. 결국 이 일은 사법부에 파격적인 ‘인사’를 부르는 계기가 됐다. 전효숙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여성으로는 첫 헌법재판관에 임명됐고, 김영란 대전고법 부장판사가 여성으로선 첫 대법관에 올랐다. 두 차례 모두 일선 판사들의 승리였다.

‘아래로부터의 개혁’을 추동하는 연판장의 위력, 그런데 공교롭게도 4·19혁명 후, 5·16군사 쿠데타의 주체세력이 되는 소장 장교들이 그 첫 열매를 맛 봤다면 믿겠나. 이들은 3·15부정선거와 군내부의 부정부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당시 육군 참모총장을 비롯한 중장급 이상 장성들의 퇴진을 요구하는 연판장을 돌리려 했다. 주도한 사람 중에 김종필 씨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모의는 사전에 발각되어 미수에 그쳤다, 하지만 이 때 집약했던 단합된 역량은 이듬해 쿠데타를 성공시키는 동력이 됐다.

연판장의 위력은 해외에서도 발휘된다. 유머집에서 종종 ‘최악의 불효자의 이름’으로 소개되는 프랑스 소설가가 있다. 에밀 졸라이다. 에밀 졸라하면 떠오르는 사건이 있다. 1899년에 있었던 드레퓌스 사건이다. 당시 모국의 군부는 유태인을 극도로 싫어했다. 이런 정서 속에서 유태인 드레퓌스 장교를 억울하게 스파이로 몰아 가뒀다. 그러자 에밀 졸라는 ‘나를 고발하라’ 이러면서 군부를 비난했다. 그러다 감옥에 갇히게 됐다. 하지만 이 사건은 수많은 지식인들을 시국선언에 동참하는 만드는 전기가 됐다. 지식인의 연판장 작성을 불러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하극상의 성격을 띤 연판장 말고도 집단의 결속을 다지기 위하여 작성하는 연판장도 있었다. 조선 말기에 경남지역의 최고의 학당이었던 진주의 낙육재 학생들은 구국의 결의를 다지기 위하여 혈서로 연판장을 작성했다. 이게 바로 혈판장인 것이다. 이는 외세를 겨냥한 것이었지만 집단서약서의 성격이 더 강했다.

그러나 연판장은 반드시 저항 또는 결기의 용도로만 쓰이는 게 아니었다. 1984년 5월 15일자 <동아일보>에 이런 내용이 소개됐다. 당시 중동 근로자들 324명이 고국 법무부 장관 앞으로 연판장을 보낸 사실이 말이다. 연판장의 내용이 기막혔다. “제비족을 뿌리 뽑아 달라”는 것이다. 남편은 열사의 나라에서 온몸을 살라 일하는데, 제비족들이 자기 부인을 꾀여 타락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법무부장관이 감동 받은 모양이지? 경찰을 시켜 65명의 ‘제비’를 붙잡게 했다고 한다.

글을 갈음한다. 연판장을 받아든 권력자들은 어떨까. 당혹감에 사로잡힐 것이다. 그러면서도 “어떤 놈이…….” 이러면서 ‘주동자’를 찾을 것이다. 과거에도 그랬다. 일본 전국시대였다. 농민들이 지배세력이었던 무사 권력에 자주 항거했다. 강한 방법으로는 무력 항쟁을, 약한 방법으로는 연판장 작성을 통해 말이다. 그 저항이 타당하건 부당하건 간에 권력자들은 주모자만은 반드시 처형했다. 설사 요구사항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말이다. 농민들은 이때부터, 연판장을 쓸 일이 있으면 ‘가라카사 연판장’이란 걸 활용했다고 한다. 가라카사는 ‘종이우산’이다. 펼쳐진 우산의 살 위에 방사상으로 쓰듯, 연판장에 참여자들의 이름을 적으면 위아래나 좌우를 구분할 수 없다. 누가 주모자인지 알 수 없게 하려는 것이었다. 우리 법원 수뇌부들, 지금 이 파동의 주동자가 누군지 궁금해 하려나. 그러지 않으리라 믿는다. 만약 그렇다면, 사법정의의 원칙과 명분을 법원 수뇌부 스스로 망각하는 불행한 상황이 올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