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은 중진 승려와 실천불교전국승가회 승려 등 1447인이 이명박 정부의 각성을 촉구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지난 6월 3일 서울대·중앙대로부터 촉발된 대학교수들의 시국선언은 4000 명을 넘어섰다. 만 명이 넘어갈 것으로 보여 바야흐로 ‘시국선언’의 물결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시국선언’이란 말의 의미부터 짚어보자. 사전을 들춰 보면 ‘시국(時局)’은 ‘당면한 국내 및 국제적 정세’로 돼 있다. 하지만 ‘시국선언’이란 단어는 아예 보이지 않는다. 시국선언이란 말은 여러 각도에서 정의할 수 있겠으나, 대체로 1960년 4·19혁명 이후 반세기에 걸친 민주화 과정에서 생겨난 ‘정치적 의사의 집단적 표현방식’을 뜻한다. 정치적 사회적 혼란이 커지거나 정부가 국민의 뜻을 거스를 때 대학교수를 비롯한 지식인들이 정국에 대한 우려를 전달하는 선언이었다.

시발점이 된 4.19 당시의 시국선언을 짚어보자.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학생 데모가 절정에 이른 1960년 4월 25일, 서울과 지방의 대학 교수 258명이 서울대 교수회관에 모여 시국 수습을 위한 14개항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학생들의 시위는 정의감의 발로이며, 부정 불의에 항거하는 민족정기의 표현이라는 ‘양심선언’이었다. 당시 교수단 시국선언은 학생들과 시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다.

4·19말고도 1970년대의 유신시대, 10·26사태 및 12·12쿠데타 직후인 1980년 ‘서울의 봄’ 상황, 그리고 1987년 6월 민주항쟁 때 시국선언은 봇물처럼 터졌다. 시국선언은 그래서, 권력이 뭔 잘못을 했을 때에 지식인 사회에서 울리는 경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왕 역사 이야기를 했으니, 시국 선언의 첫 테이프를 끊었던 4·19 당시 선언문의 제목을 보자.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이었다.

지식인의 선언은 당대의 역사의 지형을 바꾸는 동력이 됐다. 4.19 때는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는 여파를 일으켰고, 6월 항쟁 당시에는 ‘대통령 간선제’를 포기하고 직선제를 수용하는 6.29 선언을 불러왔다. 물론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와 6.29 선언이 시국선언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시민 항쟁에 지식인 사회가 화답함으로써 집권자들로 하여금 운신의 폭을 좁히도록 만든 것이다.

그러나 최근 정국 상황에서 시국 선언이 부적절하다는 지적도 있다. 보수 성향의 단체와 교수들의 목소리가 그렇다. 이 분들 논리는 이렇다. “현재 헌법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다. 집회와 시위, 선언, 성명 등 무엇이든 가능하다. 전직 대통령 가족의 집단 비리 수사가 정치탄압이거나 민주주의 퇴행이라고 지적했는데 말이 되는가. 그럼에도 교수들이 현실정치에 매몰돼 일방적이고 자아도취적인 말을 쏟아낸다면 누가 승복하겠는가. 지식인으로서 최소한의 사명감도, 역사적 무게감도, 상황판단의 균형감도 상실했다. 오히려 전직 대통령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시도야말로 반민주의 전형이다.” 이런 논리이다.

오늘의 시국선언이 과거와 다른 점, 이것만이 아니다. 엄중한 시국에 학생들이 거리에 나가 시위를 하다가 끌려가서 갇힌다. 그러면 교수들이 시국 선언을 결의한다. 그러나 요즘엔 학생들이 앞장 서 나가는 일은 없다. 이런 와중에 교수들이 먼저 시국 선언을 하는 양상이다. 또 하나는 시국 선언이 다양한 계층을 통해 발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시국 선언은 어떤 자격이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러나 최근에는 종교인, 시민사회단체 그리고 학생들까지 시국 선언을 하고 있는 양상이다. 물론 이런 시국 선언에 대한 반박성 시국 선언도 나오고 있다. 과거엔 볼 수 없었던 풍경이다. 뭐, 사실 시국 선언이 비단 정부를 향해야 한다는 금칙은 없다.

봇물 터지는 시국 선언 그리고 반박성 시국 선언, 어떻게 봐야할까. 여야 간 계층 간 세대 간 국론 분열 양상이라며 우려하는 시각이 있다. 경제 위기, 안보 위기를 맞아 그 어느 때보다 국민 통합이 필요한 이때에 불필요한 국론분열 양상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 쪽에서는 ‘소통 없는 정부’의 무한질주가 계속되는 현실은 분명 ‘민주주의의 위기’라며 온오프 어디서든 언로가 막혀있는 이때에 시국선언마저 제한해선 안 된다며 반론을 제기한다.

어쨌든 시국 선언은 사회적 분위기가 암울할 때 등장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여론을 두루 살피며 희망을 제시할 줄 아는 지도력이 절실한 때이다. 그래서 국정 쇄신에 대한 일단을 내비치며 미국을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의 귀국 후 행보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