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축통화. 요즘 국제무역이나 금융거래에는 대부분 미국 달러가 사용되고 있지요. 달러처럼 국가 간 결제나 금융거래의 기본이 되는 통화를 기축(基軸)통화라고 한다. 어려운 말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시작은 좀 쉽게 하겠다. 허경영 경제공화당 총재가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원화를 기축통화로 만들 수 있다고 장담했다. 그 근거는 딱 하나다. 중국의 위안화와 일본의 엔화, 위안과 엔 사이에 한국 돈 ‘원’이 있다는 것이다. 4차원적인 확신이다.

기축통화로서 달러화가 흔들린다 함은 결국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도 흔들리고 있는 현실이다. 국제 정치·경제는 물론 문화·스포츠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미국의 힘이 닿지 않는 곳은 거의 없다. 유일한 초강대국인 것이다. 미국은 ‘세계 경찰’의 역할마저 당연하게 여긴다. 영국에서 독립할 당시 공화국이던 미국은 지금 전 세계 120여곳에 군사기지를 가진 ‘제국’의 위상이다. 그러나 달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달러 연동 환율제’ 폐지 국가가 늘어나고 있다. 타지마할 같은 관광지가 많은 인도는 이달부터 아예 달러 입장료를 금지했다. 쿠웨이트 등은 자국통화 가치를 달러에 고정시키는 ‘달러 페그제’를 폐지하고 나섰다.

달러는 미국 내부에서도 기피 대상이다. 뉴욕 패션가를 누비는 세계적 모델 지젤 번천은 최근 미국 기업 프록터앤드갬블(P&G)과 계약하면서 달러화를 거부했다. 대신 유로화로 모델료를 달라고 요구했다. 얼마 전 모 주간지는 1달러 지폐에 새겨진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눈물 흘리는 표정을 그래픽 처리했다. 그러나 달러의 힘이 무너지는 것일까, 아니면 달러가 조정을 받는 것일까.

달러의 추락은 결국 지난 해 미국발 금융위기 탓이 크다. 미국발 서브프라임모기지 부실사태에서 비롯됐다. 돈이 여기저기서 구멍 나니, 미국 정부는 달러는 마구잡이로 찍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달러 가치가 추락하게 되는 거고, 기축통화로서의 위상도 흔들리는 것이다. 사실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영국의 파운드화(貨)가 지금의 달러와 비슷한 지위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 동안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의 경제가 큰 피해를 입은 반면, 미국은 군수물자를 공급하면서 경제가 급성장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세계 각국은 미국 달러가 세계의 중심통화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합의를 하게 된다. 각 나라는 과거처럼 자기 화폐를 금으로 바꾸어줄 의무를 지지 않으며, 미국만이 달러를 금으로 바꾸어줄 의무를 지게 했다. 이를 흔히 브레턴우즈 체제라고 한다.

하지만 미국도 베트남 전쟁을 치르면서 달러를 마구 찍어내지 않았던가. 1960년대 후반부터 미국은 경상수지 적자를 메우고 베트남 전쟁을 치르기 위해 달러를 많이 발행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71년에 당시 닉슨 미국 대통령은 달러를 금으로 바꾸어주지 않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그 후 달러의 가치가 폭락했지만 40년이 지난 지금도 달러는 세계경제에서 화폐의 우두머리로 여전히 남아 있다. 왜 달러가 영향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세계 최대의 경제 대국이며 교역국이기 때문이고 막강한 군사력도 달러에 대한 신뢰를 높이는 데 기여한다. 게다가 발달된 금융시장 덕도 보고 있다. 그러나 그 덕이 이제는 허물이 돼서 달러화 붕괴의 원인 되고 있다.

달러화의 위기는 결국, 기축통화를 꿈꾸는 다른 나라들의 공작과 무관해보이지 않는다. 그 다른 나라들 중 우두머리는 역시 중국이다. 사실 중국의 달러 흔들기는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이에 대한 미국 경제 브레인의 반응 역시 신경질적이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말이다. “달러화는 현재 대단히 강력합니다. 투자자들이 미국 경제를 세계 최강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라는 말이다.

어떻게, 현재 많은 국가의 외환보유액이 달러로 채워진 현실에서 달러를 대체할 새로운 기축통화가 등장할까. 당장 등장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렇다고 달러가 예전처럼 막강한 위력을 계속 발휘하기도 어렵다. “달러가 기축통화의 지위를 바로 상실하지는 않더라도 독점적 지위는 잃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 많다. 이런 가운데 중동 산유국들은 중국, 러시아, 유럽연합과 함께 공공연히 석유 결제통화를 유로 같은 다른 통화로 바꾸는 일을 꾸미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임기영 한국외대 국제통상학부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달러화의 몰락은 단기적으로 우리 경제를 비롯한 세계 경제에 먹구름을 몰고 올 가능성이 높다. 미국의 경제규모는 세계 전체의 20% 남짓에 불과하지만 세계의 외환보유고에서 달러의 비중은 70%에 이른다. 기축통화로서 달러가 흔들리면 그 파장은 경제의 범위를 넘어서 국제 질서의 재편까지 불러올 수 있다. 불안한 시대다. 세계가 과연 어디로 갈 것인가. 대외 의존도가 높은, 특히 대미 의존도가 높은 우리는 달러의 몰락에 제대로 대비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