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큰 용기를 지닌 사람은 돌연 일을 당해도 놀라지 않으며, 억울하고 당혹해도 노여워하지 않으니, 그가 가슴에 품은 것이 매우 크고 그 뜻은 매우 원대하다.” 이 시는 소동파의 ‘유후론(留侯論)’의 한 구절이다. 추이톈카이 중국 외교부 부부장이 최근 중국을 방문한 천영우 외교통상부 2차관에게 이 구절을 직접 써서 액자에 담아 선물했다고 한다.

소동파의 유후론에 대한 설명이 더 필요할 것 같다. 한(漢) 나라 개국공신인 유후 장량이 사소한 일에 화내지 않고 인내심을 보이자 이에 감탄한 한 노인이 ‘태공병법’을 주었고, 장량은 이 책을 익혀 한 시대의 지략가가 됐다는 이야기다. 소동파는 “장량의 도량이 부족한 것을 우려한 노인이 작은 화를 참고 큰일을 도모하도록 가르치려 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지금 한중 두 나라 사이에 최대 현안은 천안함 문제이다. 우리는 “천안함 사건이 북한의 공격에 의한 것이 분명하다”며 북한을 상대로 한 제재에 동참해달라고 중국에게 요구했다. 이에 대해 중국 외교부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며 지극히 원칙적인 입장을 녹음기 틀 듯 반복하고 있다. 따라서 액자의 글귀(‘큰 나라라면 억울하고 당혹스러운 일에도 노여워하지 말라’)는 중국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의미심장한 것이다. ‘북한을 너무 미워하지 말라’ 이런 뜻으로 읽힌다.

○…중국은 대외관계에서 중요한 시기마다 ‘고사성어 외교’로 뜻을 간접적으로 나타냈다. <동아일보>를 보니, 지난달 베이징에서 열린 미중 전략경제대화에서 다이빙궈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은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에게 “오는 것이 있으면 가는 것이 있어야 한다(禮尙往來)”고 응수했다는 내용이 있다.

또한 중국의 후진타오 주석은 2006년 4월, 미국에 건너가서 "모진 풍파 이겨내고 때가 되면 돛 높이 달고 창해를 건너리" 이런 내용의 시를 읊었다. 이는 이백의 유명한 행로난(行路難)이란 시이다. ‘미국과 맞상대할 수 있는 힘을 기를 때까지는 참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우리 정치에서도 고사성어가 오가는 풍경, 최근 들어 자주 볼 수 있다. 연초에 정몽준 한나라당 당시 대표와 박근혜 전 대표의 미생지신(尾生之信) 논쟁을 대표적으로 들어본다. 미생지신은 춘추시대 미생이라는 사람이 애인과 만나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비가 퍼붓는데도 다리 밑에서 기다리다가 결국 물에 휩쓸려 죽었다는 중국 고사를 말한다.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다는 뜻으로 많이 쓰인다. 그런데 이게 신의가 깊다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그러다보니 미생지신을 놓고 서로 아전인수였다. 정몽준 대표는 세종시 수정안에 대해 거부 입장을 분명히 하는 박근혜 전 대표가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다’며 힐난했다. 그러자 박근혜 전 대표는 "미생은 죽었어도 귀감이 됐고 애인은 평생 괴로움 속에 손가락질 받았다"고 맞받아쳤다.

○…과거 정치인들은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표현할 때 고사성어를 많이 이용했다. 문민정부 창업 공신인 김재순 전 국회의장이 정권 출범 직후 재산공개 파문 때문에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니까 '토사구팽'(兎死狗烹) 즉 '토끼 사냥이 끝난 뒤 사냥개를 잡아먹는다'라고 토로했다.

같은 상황에 처한 박준규 전 국회의장은 자신의 심경을 '격화소양'(隔靴搔痒) 즉 '신을 신은 채 바닥을 긁으면 소용이 없다'에 빗댔다. 그런데 박준규 전 의장은 상당히 오랫동안 버티다 그만뒀다. 그만두면서 ‘격화소양’ 이 말을 토해냈는데. 이를 두고 당시 취재기자들은 “토사구팽보다 멋진 4자성어를 생각하느라고 그랬다”라는 우스갯소리를 내놓았다.

○…고사성어 정치의 진정한 달인은 따로 있다.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이다. 권력다툼에서 밀려 외국으로 나갈 때엔 “자의반타의반(自意半他意半)으로 나가는 거야”라고 했고, 1980년 신군부가 등장하자 ‘봄이 왔지만 봄이 아니다’라는 뜻의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을 들었고, 1995년 김영삼 당시 대통령과 결별할 때는 김재순 전 의장처럼 “토사구팽(兎死狗烹)”을 인용했다. 1997년 대선이 있던 해 신년휘호로 “줄탁동기(啐啄同機)”를 택했다. 이건 '알을 까기 위해 알 속의 새끼가 부리로 알을 두드리면 밖에서 어미가 껍질을 쪼아 새끼를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한다'는 뜻이다. 김종필 전 총재의 뜻은 "알 속의 새끼는 정치 지도자, 알 밖의 어미는 국민으로, 국민이 원해야 대선에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해 김종필 전 총재, 출마하려다 말았다.

○…사자성어 말고도 시로써 자신의 마음을 대변하는 경우도 많았다. 40대의 정치인 존 F 케네디의 대통령 취임식장, 80대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가 나타났다. 시인은 “대지는 우리가 그 대지에 속하기 전 우리의 것이었다”로 시작하는 시 ‘The Gift Outright(무조건적인 선물)’를 암송했다. 자기가 암송한 것도 아닌데, 케네디는 이 일만으로 ‘문화 대통령’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분신으로 평가받던 박지원 현 민주당 원내대표. 검찰에 출두하면서 시와 동행했다. 감옥을 눈앞에 두고 조지훈의 시 ‘낙화’ 중 첫 구절로 심경을 표시한 것이다. 이 시는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로 시작한다.

○…메마르고 거친 정치 또 외교 현장에서 고사성어, 시가 자주 등장할수록 분위기는 훨씬 부드러워진다. 왜냐. 일단 우회적인 표현에는 상대를 배려하는 뜻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표현 속에 담긴 뼈는 노골적 언사에 비해 매우 예리하고 단단할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대를 더욱 아프고 긴장하게 만들 것이다.

이뿐 아니라 직설적 표현은 잠시잠깐의 주시 효과를 나타낼 뿐, 시나 고사성어같은 비유적 표현처럼 널리, 빠르게 전달되면서 오래 기억되지는 못한다. 우리 정치와 외교에 이런 격조가 있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