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은 기원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손자(孫子)’에 ‘용간유오(用間有五, 엿보는 사람이 다섯이다)’라는 대목이 있는 걸로 봐서 말이다. 참 유구(悠久)하다는 이야기이다.

붉은 머리, 푸른 눈의 28살 러시아 여성, 안나 채프먼. 상류층만 출입하는 클럽을 드나들며 미국 사교계의 거물로 활동해 왔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스파이였다. 채프먼을 포함해 최근 미국에서 러시아 간첩 11명이 붙잡혔다. 이 일로 정상끼리 햄버거 점심으로 우의를 다진 지 나흘 만에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 한랭전선이 형성돼 버렸다.

그런데 이상하다. 미국 중앙정보국에서 간첩활동을 지휘했던 고위급 인사는 '이게 과연 스파이들이 할 일인가'라며 반문한 것이다. 특수 훈련 경험, 최첨단 무기로 무장, 미국 문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 보유 그리고 미모. 스파이로서의 구색은 어느 정도 갖춰진 형편이다. 그러나 정작 주 업무인 기밀정보 수집에는 실패했다는 지적이다. 미국 정보당국은, 이 스파이들을 민망하게 만들려고 그랬는지 법이 그래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간첩 혐의는 적용하지 않고, 외국 정보기관을 위해 불법적으로 활동한 혐의와 돈세탁 혐의를 묻고 있다.

통상 여간첩하면 미모를 기본으로 여긴다. 그런 의미에서 1차 대전 때 독일과 프랑스를 오가며 스파이 활동을 한 혐의로 사형된 마타하리는 하나의 상징이다. 미모만이 아니었다. 마타하리의 성과는 채프먼에 비교할 바 아니다. 마타하리가 빼낸 정보는 연합군 5만 명의 목숨을 잃게 할 만한 것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몇 줄로 축약한 마타하리의 일생은 이러하다. 인도네시아어로 ‘여명의 눈동자’란 뜻인 마타하리는 이혼한 뒤, 파리의 물랭루주 댄스홀에 나타나 배꼽을 드러낸 발리 댄스로 남성들을 사로잡았다. 그렇게 세간 남성의 눈에 들어온 마타하리. 그러나 꼬리는 길었다. 1차 대전 때에 간첩으로 의심을 받기 시작했다. 베를린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프랑스군 장교인 20살 연하의 연인을 만나려고 파리로 들어간다. 붙잡혔다. 물론 “자신은 간첩이 아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결국 12명의 사수에게 총살당한다. 놀라운 부분은 총살을 당하는 순간에도 마타하리는 얇은 비단스타킹에 모피코트 차림으로 눈가리개를 거부한 채 당당히 처형대에 섰다는 점이다. 그러나 ‘마타하리가 정말 스파이였냐’를 두고는 여태껏 규명되지 못했다.

‘한국의 마타하리’도 있다. 김수임이다. 이화여전을 졸업한 인텔리에 미모인 김수임은 세브란스병원에서 통역을 하다 공산주의자 이강국을 알게 된다. 그리고 동거한다. 그런데 김수임은 얼마 안 있어 미8군 헌병감인 베어드 대령과 동거한다. 이강국과 헤어져서 일까. 아니다. 김수임은 이강국을 베어드의 집에 숨겨주고 월북시켰다. 훗날 이강국은 북한의 초대 외무부장이 된다. 모든 게 다 발각됐다. 친구인 시인 모윤숙의 집에서 체포된 김수임은 6·25 발발 직전 총살됐다. 그러나 몇 년 전 공개된 베어드 대령에 대한 미국 측 조사보고서를 보면 김수임의 혐의는 대부분 ‘증거 불충분’으로 기록됐다고 한다. 마타하리와 비극의 양상이 너무 닮았다.

성공했던 여간첩도 있었다. 루스 쿠친스키란 소련 첩보원이었다. 소냐란 암호명을 쓴 쿠친스키는 1933년 러시아 정보국 요원이 된 뒤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영국에서 '붉은 오케스트라'라는 유럽 안에서의 조직망을 관리했다. 스파이 활동을 위해 정략적으로 결혼한 세 번째 남편과 아이 둘을 낳기도 했다. 결국 한 번도 들키지 않았다. 그러나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45년과 1947년 체포된 요원들이 자신의 이름을 고백한 것이다. 그러나 쿠친스키는 너무나 평범한 외모를 이용해 동독으로 탈출했다.

김수임, 쿠친스키 모두 이중간첩인데. 이중간첩하면 우리는 이수근을 연상하게 된다. 북한 <조선중앙통신> 부사장이던 이수근은 1967년 3월 귀순했지만 2년 뒤 위조여권을 이용해 홍콩으로 출국했다가 체포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같은 해 7월 사형됐다. 이수근은 왜 남한을 떠났을까. 남한에서도 감시와 협박 속에 체제선전 도구로 시달리다 제3국행을 시도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과거사위원회는 그래서 ‘이수근은 이중간첩이 아니었다’고 결론을 내렸단다. 억울한 죽음이었다는 얘기이다.

동서 냉전이 심화됐을 때, 미국에서는 소련 간첩, 소련에서는 미국 간첩이 적발된 일도 있었다. 전자는 구 소련군 정보 총책임자 디미트리 폴랴코프 장군이다. 미국 중앙정보국은 폴랴포크 장군을 1961년 포섭한다. 그리고 1960년대 말 미얀마에 주둔할 때 중국ㆍ베트남군 정보 같은 소련군이 수집한 공산권 국가의 정치ㆍ군사 정보를 얻었다. 빼돌린 소련군의 탱크 요격용 미사일 기술 정보는 미국이 걸프전 당시 소련제 탱크로 무장한 이라크군을 격파하는데 유용하게 사용됐다. 그러나 발각됐다. 괘씸하기 짝이 없는 중범죄였다. 결국 그는 처형 당했다. 이번엔 후자. 2001년에는 무려 27년 동안 미국 연방수사국에서 방첩 임무를 맡아왔던 로버트 필립 핸슨은 1985년부터 15년 동안 구소련과 러시아를 위해 이중간첩 활동을 한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두 대립되는 나라로부터 모두 인정받은 스파이도 있었다. 2차 대전 때 영국과 독일 양측 모두가 신임했던 두잔 포포프가 유명하다. 유고슬라비아 태생인 포포프는 처음에는 독일 정보기관에 포섭됐다가 나중에 영국 정보기관으로부터 이중간첩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리고 1944년 6월에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앞서 독일군의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거짓 정보를 흘렸다. 연합군의 상륙지점이 노르망디가 아닌 칼레라는 식으로 거짓 보고를 한 것이다. 이 사람은 독일의 로켓 개발에 관한 정보도 영국에 넘겼다.

이번 러시아 간첩과 관련한 뉴스를 보면서 ‘순 오합지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렇게 허무하게 붙잡힐까 하는 생각에 말이다. 그러나 과거 공산권의 CIA 지부에서 비밀리에 활동했던 인사는 이걸 "해일 메리 패스(Hail Mary pass)"라고 표현했다. 미식축구에서 경기가 끝날 즈음 무작정 전방을 향해 던지는 패스처럼 여기저기 정보원을 심어놓고 행여 낚일지 모를 '대어'를 기다리는 행태라는 것이다. 이를 테면 "느리고 끈질긴 수법"이라 하겠다. 따지고 보니 공작에 앞서 유명인사와 친분 쌓는 일은 게을리 하지 않았다. 팜므파탈이 돼 버린 채프먼은 저명한 미국 경제학자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에게 접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시대에 따라 간첩의 주체와 역할, 수행 방법에 큰 변화가 따르는 형국이다.

□ 참고 자료

-SBS '8뉴스' 2010. 6. 30 "본드걸 같은 미모의 여간첩…미-러 '스파이 전쟁'"
-연합뉴스 2010. 6. 30 "러시아 스파이들 기밀정보 헛발질?"
-서울신문 2004. 9. 9 "[씨줄날줄] 마타하리"
-한겨레 2007. 1. 18 "[유레카] 이중간첩"
-한국일보 2010. 6. 5 "[지평선] 이중간첩"
-조선일보 2010. 1. 23 "[Why] '내 안에 또 간첩 있다'"
-한국경제 2010. 5. 25 "[천자칼럼] 여간첩"
-세계일보 2007. 11. 12 "[설왕설래] 산업스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