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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현세자빈의 묘역 아래에 서있는 400년된 느티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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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승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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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쟁이 생활 30여년의 애환이 깃들었던 회사에서 정년퇴직을 한 후 매주 한 번씩 등산을 한 지도 벌써 6년이 지났다. 등산은 이제 빼놓을 수 없는 내 생활의 일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무기력한 삶에 활력을 주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아니, 이만큼 했으면 이제 산이 익숙할 때도 된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오를 때마다 힘이 들까?"
역시 같은 시기에 정년퇴직을 하여 6년여를 매주 빠짐없이 등산을 함께 한 친구의 푸념이다. 체력이 약한 편이어서 등산을 할 때마다 너무 힘들지 않는 곳으로 가자고 주문하는 친구이기도 하다.
"어디 등산뿐이겠어? 따지고 보면 우리네 삶이라는 것도 그렇지. 평생을 살아온 삶이건만 어렵고 힘들기는 마찬가지잖아?"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익숙하기로 치면 그저 속절없이 흐르는 세월 따라 60여년을 살아온 삶만큼 익숙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하긴 그래, 그래도 그렇지 오늘은 초반부터 너무 힘이 드는 걸."
이번 산행은 그가 정한 산이었다. 경기 광명시에 있는 구름산, 해발 237m로 나지막한 산이다. 그런데 이날따라 등산초입부터 헉헉거리는 것이 여간 힘들어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제 또 주책없이 술 많이 마셨구나?"
"허허허, 어떻게 알았지?"
역시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규모의 산에서 저렇게 쩔쩔맬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제, 00대 동창모임이 있었는데, 또 나를 부르잖아? 거참, 녀석들이 자기네 동창들 끼리나 놀 일이지, 번번이 나를 불러서 과음을 하게 만든단 말이야."
이 친구는 그 대학 출신이 아니었다. 전통적으로 라이벌의식이 강했던 두 대학교 중의 하나, 친구는 두 대학교 중 다른 대학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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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현세자빈 강빈의 무덤인 영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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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승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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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른 대학동창들 몇 명이 모이는 모임에서 몇 년 전부터 이 친구를 불러준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들 중에 특별히 친했던 친구가 하나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까지 그가 함께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면 가능한 일이 아니다.
"백수인 주제에 거드름을 피울 수도 없고, 그렇지? 그리고 누구나 불러주면 핑계대지 말고 기꺼이 달려가야 하는 것이 백수수칙 중의 하나라면서. 허허허."
이 친구는 체격은 작고 약해 보여도 목소리는 걸걸하다. 정말 어려운 친구나 이웃을 아무도 몰래 도와주기도 하는, 그 목소리만큼이나 마음 씀씀이도 넉넉하고 착한 친구다.
체력이 약한 편이지만 평생 술을 즐겨온 이 친구는 산행 후에도 단 몇 잔이라도 술을 빼놓는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술이나 마시고 해롱거리며 세상을 마구 함부로 살아온 친구는 전혀 아니다.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타인에는 상당히 관대한 편이지만 불의와는 타협할 줄 모르는 강직함도 있는 친구다.
토목학을 전공했지만 그 깐깐한 일처리와 정직성 때문에 직장생활을 할 때는 자금과 경리관계 일을 주로 맡아 했던 친구였다. "그 친구들이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는구먼" 내가 툭 던진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친구에게서는 아직도 나이에 걸맞지 않게 순진함이 묻어난다.
"그래, 그렇게 불러주는 친구들이 있는 것이 행복한 거야. 술 마시면서 싱거운 헛소리도 많이 하겠구먼."
그러자 이 친구 얼굴이 갑자기 환해진다.
"싱거운 헛소리? 그거야 내 주특기잖아?"
젊은 시절에는 주변에서 상당히 깐깐하다는 평을 들었던 친구가 나이 들어가면서 싱거운 사람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모습은 여간 멋지고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그래, 그렇게 사는 거야. 때론 싱거운 사람, 때론 조금은 바보처럼 보이는 것도 괜찮지, 삶을 마무리 하는 단계에서까지 너무 완벽하면 정도 안 가고 징그럽잖아?"
정말 그럴 것이다. 모든 것이 너무 완벽한 사람만큼 숨 막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그런데 말이야. 이놈의 세상이라는 곳이 조금만 빈틈을 보이면 그 빈틈을 비집고 들어오려는 사악한 것들 때문에 문제지만."
산길은 등산이라기보다 산책로에 가까울 만큼 아기자기한 모습이다. 적당히 오르내리는 등산로 곳곳에는 쉴 수 있는 의자와 쉼터가 마련되어 있고 약간 가파른 곳에는 어김없이 계단이 설치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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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 산이 구름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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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승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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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은 평소 함께 하던 친구 중의 한 명이 일 때문에 빠져서 모처럼 둘만의 오붓한 산행이었다. 천천히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에는 운산정이라는 날아갈 듯 멋진 정자가 세워져 있었다.
"어때? 저쪽 서독산까지 가볼까?"
내가 슬쩍 약을 올려 보았다.
"오늘은 도저히 안 되겠어. 나 좀 봐줘! 이만 내려가자고."
우리가 걸어온 뒤쪽으로는 광명시가지가 펼쳐져 있고 맞은편은 관악산 줄기인 삼성산이 안개에 덮여 있었다.
"그럼, 요 아래 소현세자빈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내려갈까?"
그쪽으로 내려가는 길은 상당히 가파른 길이었다. 그러나 낮은 산이어서 잠깐만에 골짜기를 거쳐 산 아래로 내려섰다. 완만한 경사면에는 저만큼 철제 울타리에 둘러싸인 무덤 하나가 노란 잔디로 덮여 있다. 소현세자의 빈이었던 강빈의 묘로 사적 357호인 영회원이다.
무덤은 고운 잔디가 덮여 있고 무덤 앞과 옆에는 혼유석과 문인석, 석마와 석양, 석호 등이 서 있었으나 비석도 정자각도 보이지 않는 약간은 초라한 모습이다. 강빈은 당시 우의정을 지낸 강석기의 딸로 조선조 16대 왕 인조의 맏아들이었던 소현세자빈이다.
소현세자는 조선의 역대 임금 중에서 치적이나 인품면에서 선조와 함께 그야말로 별 볼일 없었던 왕으로 통하는 인조임금의 맏아들이다. 기울어가는 명나라와 새로운 세력으로 팽창일로에 있던 청나라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로 국가를 경영하던 광해군을 몰아내고 임금이 된 인조는 결국 청나라의 침공으로 삼전도에서 치욕을 당하고 항복한다.
이때 소현세자와 강씨도 함께 청나라의 볼모로 끌려가 9년에 가까운 세월을 그곳에서 지낸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와 조선 사이의 창구역할을 담당하며 조선쪽에서 보면 때로는 악역을 할 수밖에 없어 인조의 미움과 의심을 받게 되지만 새로운 문물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된다.
한편 강빈은 조선에서 끌려간 백성들의 참담한 모습을 현장에서 목격하며 무역과 농업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노예로 팔리는 그들을 구하는 놀라운 역할을 하다가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했다. 그러나 이미 인조의 미움과 청나라에 의해 자신을 밀어내고 왕위를 노리는 세자로 의심을 받던 소현세자는 귀국 후 2개월도 지나기 전에 부왕이었던 인조가 독살했다는 세간의 의혹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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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낚시꾼 없이 낚시터가 텅 빈 저수지 풍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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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승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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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세자빈 강씨는 아무도 관심 갖기를 두려워하던 소현세자의 죽음에 대한 의혹을 풀어보려고 했지만 역시 인조임금에 의해 폐서인이 되어 궁궐에서 쫓겨난 다음날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새로운 문물에 눈을 뜨고 국제정세를 읽을 줄 알았던 소현세자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CEO라고 할 수 있었던 세자빈 강씨는 어쩌면 그 시절에 가장 바람직한 임금이요 왕비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청나라에 대한 증오와 복수에 불타고 있었던 부왕과 조야의 정서를 읽지 못했던 소현세자는 어쩌면 약삭빠르지 못하고 눈치 없는 어리석은 세자였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죽음과 함께 세자의 아들이며 인조임금의 손자로서 왕통을 이어갔어야 할 세 명의 아들들도 제주도로 유배되어 풍토병으로 죽고 말았으니 절대 권력의 비정함이 참으로 끔찍하기만 하다.
그 한 많은 사연을 안고 잠들어 있는 소현세자빈 강씨의 무덤을 돌아보고 내려오는 길에는 400년을 넘긴 느티나무 한 그루가 의연한 모습으로 서 있다.
"그놈의 권력이라는 것이 뭔지? 참 비정한 왕이요 아비로구먼. 자기 자식이고 손자들인데 그렇게 참혹하게 몰살을 시킬 수 있나. 세상 참."
"그러게 말이야. 좀 약삭빠른 세자였다면 그렇게 죽지는 않았을 텐데, 부왕의 비위나 맞춰 주다가 왕좌에 올랐을 것을. 시류에 영합해야 출세하고 살아남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가봐!"
한참을 더 내려와 산 구비를 돌아서니 낚시터가 빙 둘러 만들어진 저수지가 텅 빈 모습으로 쓸쓸하다. 뒤돌아보니 구름산과 세자빈 강씨의 무덤 위의 푸른 하늘에 흰 구름 한 무리가 두둥실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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