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애리조나 총기난사 사건의 현장인 투손을 방문해, 30분이 넘는 추모연설에서 9살 난 최연소 희생자 크리스티나 그린을 언급하다 말이 아닌 ‘51초의 침묵’으로 독설이 판치던 정치판과 국민들의 삭막해진 마음을 녹여냈다.

이 51초의 침묵, 어떻게 나온 것일까. “우리 민주주의가 크리스티나가 상상한 것과 같이 좋았으면 한다.”고 말한 뒤 연설을 중단해, 10초가 지나자 오른쪽을 봤다. 10초가 더 흐르자 심호흡을 했고, 30초가 되자 감정을 추스른 뒤 어금니를 깨물고 연설을 이어갔다.

이 연설에 2008년 대통령 선거 당시 경쟁자였던 존 매케인 공화당 상원의원까지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16일자 <워싱턴포스트> 기고에서 매케인은 “오바마 대통령은 희생자들의 명예를 높이는 동시에 감동시켰고, 슬픔에 잠긴 미국을 위로했으며 공직자들에게 새로운 용기를 줬다”고 칭찬했다. 그러면서 “나는 대통령의 정책의 많은 부분에 반대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이 자신의 재임 기간에 미국의 발전에 헌신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애국자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반대편에 섰던 이들의 지지와 격려, 참 이상적인 모습이다.

‘오바마의 저격수’인 폭스뉴스 토크쇼 진행자 글렌 벡도 “연설 중 최고”라고 하더니 “이 사람이 미국 대통령임에 감사란다”고 극찬했다. 뉴욕타임스는 "그의 재임 2년 중 가장 극적인 순간이었다"고 썼다. 사실 오바마는 매끄러운 말솜씨로 사람들을 휘어잡아 대통령이 됐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Yes, we can)를 목소리 높이며 대선 내내 미국의 희망을 역설했던 오바마 아닌가. 2008년 11월 4일 대선 승리 수락 연설에서는 “미국이 모든 것이 가능한 나라라는 점을…, 그리고 민주주의가 가진 힘을 여전히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면, 오늘 밤이 바로 그 답입니다”라고 이야기했을 때엔 글로벌 금융위기로 휘청이던 저무는 태양의 미국은 완전히 잊혀졌다. 그러나 오바마의 집권 후 사람들은 그 매끄러움에 식상해 가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번엔 말이 아니라 말을 안 함으로 감동을 준 셈이었다.

신문을 보니 어느 묵언(默言) 수행자의 말이 인용된다. “사람이 하루에 얼마나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하고 있는지를 침묵해 보면 안다”는. 보통 사람들은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1시간 입을 닫아 놓는 경우가 드물다. 지식인이든 노동자이든 뭔가 말하지 않으면 존재감을 못 느끼는 듯 나불거리곤 한다. 오바마는 비록 51초간 말문을 닫았음에도 강한 공감대를 형성했던 것이다.

“순수하고 진지한 침묵이 사람을 설득시킨다”는 셰익스피어의 금언이 떠오른다. 침묵과 관련한 금언 몇 가지를 더 소개해본다. 노자는 우주가 탄생하기 전의 침묵의 상황을 ‘적요(寂寥)’라고 표현했다. 그것을 만물의 어머니, 즉 근원으로 봤다. 플루타크 영웅전에는 “인간은 인간에게서 말하는 것을 배우고 하나님에게서 침묵을 배웠다”고 기술한다. 탈무드는 “침묵 속에 있는 사람은 신에 가까이 가기가 쉽다”고 가르친다.

명연설가들을 보면 침묵의 가치를 아는 이들이 많다. 프레젠테이션의 귀재로 불리는 스티브 잡스는 가끔씩 슬라이드를 텅 비워 버린다. 말도 잠시 끊는다. 그 순간 청중은 다음에 무엇이 나올지 신경을 곤두세운다. 연설 전문가들은 청중을 긴장시키는 네 가지로 눈맞춤, 질문, 다가서기와 함께 침묵을 꼽는다. 나폴레옹과 히틀러도 청중 앞에서 한동안 침묵하다 연설을 시작하는 방법을 애용했다.

따지고보면 길어야, 달변이어야, 목소리가 높아야 연설을 잘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1832년 베니토 후아레스 멕시코 주의회 의원. 스물여섯 살이었다. 키 160㎝에 외모마저 볼품없었다. 누구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후아레스는 아무 말 않고 서 있기만 했다. 의원들이 하나 둘 연단에 집중했고 드디어 장내가 조용해졌다. "자유를 달라. 존엄을 달라. 인권을 달라." 후아레스가 짤막하게 외쳤다. 그는 침묵으로 정치권의 첫 주목을 끈 지 30년 만에 멕시코 첫 직선 대통령이 됐다.

정치인은 말로써 존재감을 드러내는데 침묵만 칭송하는 것도 무리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있다. 사실 말의 정수(精髓)는 연설이다. 한편의 연설로 주장·가치관, 신념을 드러낼 수 있는 데다 감동을 선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로 사람을 움직이고, 말로 세상을 뒤흔든 ‘명연설’은 동서양을 떠나 짧게는 몇년 또는 수백년, 심지어 수천년의 세월도 건너뛴다. 미국 제32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지난 1933년 3월 4일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것은 두려움, 그 자체입니다.”라며 입을 뗐다. 대공황 아래 신음하는 국민들을 안심시키고 용기를 복돋워 주기 위해서였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에는 침묵의 묘미를 맛보게 해 줄 정치인을 보기 힘들다. 오바마의 이 말이 ‘51초 침묵’을 빛나게 했다. "우리를 분열시키는 힘은 우리를 단결시키는 힘보다 강하지 않다"고 역설한 대목 말이다. 보수와 진보 가릴 것 없이 찬사가 쏟아졌다. 편 가르기 좋아하는 정치, 진정성 없는 악담과 독설이 난무하는 정치, 이런 정치에서는 차라리 침묵이 금이 될 것 같다. 한국 정치권에 또 다른 의미의 침묵이 필요하다 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