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 구본무 회장이 “‘이제 협력회사에 갑을 관계는 없다’라고 말하라”고 해서 화제다. 올해 승진한 신임 임원 93명에게 협력회사와의 동반 성장을 강조하는 자리에서 나온 말이다. 어떤 식으로 동반 성장을 하자는 것일까. 구체적인 언급이 나왔다. “협력사에 대한 자금 지원뿐 아니라 미래기술 육성을 위한 연구개발 지원, 장비 및 부품 국산화 확대 등을 통해 근본적인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사실 대기업 회장이 이런 언급을 의지를 담아 한 사례 참 찾기 드물다.

갑을 관계는 본래는 계약서에 나오는 두 당사자를 약칭하는 용어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비단 계약관계에서뿐 아니라 다른 사회관계에서도 협상력이 있는 자 즉 요구하는 자와 협상력이 없는 자 그러니까 요구에 따라야 하는 자를 칭하는 말로 변질됐다. 사실 이게 본래 두 당사자가 '대등'하다는 점을 전제로 만들어진 법이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당사자 사이에 협상력의 차이가 심하면 즉 힘의 균형이 대등하거나 공평하지 않으면 적용할 수 없다. 대표적으로 원청업체와 하청업체 즉 대기업과 협력업체 사이같이 이미 피라미드형 먹이사슬이 배어 있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사실 그래서 당사자 사이에서 어쩔 수 없는 힘의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하여 노동법, 공정거래법, 하도급법 같은 이른바 '사회법'이 마련됐다.

작년 8월, 이명박 대통령은 대기업들이 중소기업들에게 각종 횡포를 부리는 건 정부가 나서서 막겠다고 강조했다. "시장경제라고 하는 것은 갑과 을 또는 공급자와 수요자가 균형된 힘을 가지고 있을 때 시장경제가 되는 것이지, 갑이 절대적 권한을 갖고 있다가 너 싫으면 관둬라, 납품하지 마라, 할 사람 많다, 이런 가운데에서는 시장경제는 절대 정립될 수가 없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갑을관계는 대기업과 하청업체와의 관계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사회 전반으로 확장되고 있다. 즉 법과 제도만으로는 갑을관계를 소멸시킨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으며, 오히려 이를 바로 잡으려는 국가의 시도가 있으면 있을수록, 현실에서는 이를 무력화시키기 위하여 갑을관계가 더욱 교묘한 방법과 방식으로 작동하게 된다. 시장조사업체 이지서베이가 지난해 8월, 직장인 550명을 대상으로 '회사 내 갑을 관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느냐'고 질문한 결과 응답자의 85.3%가 '그렇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들 중 갑을 관계를 느끼는 순간으로 '평소에 매일'을 꼽은 사람이 46.1%로 가장 많았다.

그런 상황에 직면해서는 어떻게 대응한다고 했을까.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선 '그냥 참는다'고 응답한 사람이 66.9%로 가장 많았다. '싫은 내색을 한다' 23.5%, '상대에게 따진다'는 응답은 7.6%였다. 한편 설문에 참여한 직장인 중 61.6%는 '거래처 중에서 갑으로 군림하는 곳이 있다'고 지적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 어불성설이 아니었다.

이제 갑과 을의 종속 또 피종속적 관계를 청산하는 길을 찾아봐야 한다. 이러기 위해서는 인식의 전환이 시급하다. 을을 쥐어짜면 갑에게도 근본적으로 위기가 닥쳐온다는 쪽으로 생각을 바꿔야 한다. 도요타의 예를 들자 2007년 미국 GM을 제치고 세계 자동차업계 1위로 뛰어올랐지만 곧 몰락했다. 지나친 원가절감의 폐해가 원인이었다. 도요타는 국내외 부품업체에 2013년까지 납품가격을 30% 이상 낮출 것을 요구해 경영상의 부담을 고스란히 하청업체에 떠넘기려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청업체 쥐어짜기’에 관한 한 한국의 대기업도 자유롭지 않다. 한국산업연구원 분석에 따르면 2008년 현대차의 영업이익은 4년 전보다 5.3% 줄어든 반면, 국내 5개 자동차업체에 납품하는 우량 협력업체 17개사의 평균 영업이익은 22.4%나 감소했다. 중소기업들은 “대기업의 단가 후려치기가 지속되면 도요타사태가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며 걱정했었다. 1차 협력업체의 2, 3차 협력업체 쥐어짜기도 심하다. “1차 협력업체들이 대기업 계열 원청업체로부터 받는 납품가를 중간에서 심하게 후려치는 일이 잦다”고 했다.

갑을 사이임을 잊게 만드는 회사의 예도 있다. 바로 애플이다. 전 세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애플의 아이폰 부품 중 40% 이상은 벤처기업이 만든다. 그만큼 대기업에 중소기업은 없어서는 안 될 파트너라는 얘기다. 애플에 부품을 대는 한국의 한 중소기업 사장, “애플은 기본적으로 우리를 좋은 제품을 만들어 판매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파트너로 인정했으며 파트너가 기분 좋게 일해야 좋은 제품을 공급받을 수 있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하청업체를 닦달해야 좋은 제품이 나온다는 인식이 아닌 것이다.

애플이 이 중소기업과 연간 수십억원짜리 계약을 맺는 과정은 의외로 간단했다. 애플의 엔지니어가 이메일을 보내 원하는 품질의 제품을 원하는 만큼 만들 능력이 이 회사에게 있는지를 문의했다. 이 과정에서 부품 도면을 제출할 필요도, 거래처 목록을 건넬 필요도, 인맥을 동원해 로비할 필요도 없었다. 애플 직원이 실사를 나오거나 납품업체 등록을 위한 무리한 요구를 하지도 않았다. 애플의 구매담당자와 만나 단가를 논의할 때도 대등한 관계에서 합리적인 협상이 이뤄졌다. 단가 후려치기 따위는 없었다. 세계 1등 스마트폰 아이폰 성공신화의 배경은 이러하다. 갑을관계를 강조하면 갑도 을도 불행해진다는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