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회찬 진보신당 상임고문은 본인이 쓴 책 '진보의 재탄생'에서 "나는 다시 꿈을 꾼다. 누구나 원하는 만큼 교육받을 수 있는 나라,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는 나라, 인터넷 접속이 국민의 기본권으로 보장되는 나라,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국민이 악기 하나쯤은 연주할 수 있는 나라"라고 말했다. ⓒ자유혼

최근 유럽식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강남 좌파가 조명받고 있다. 비판하는 쪽도 있고, 옹호하는 쪽도 있어 문제적 존재로 떠오르고 있다.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를 맞아 대한민국 좌파가 분화하는 신호탄이 될까. 부자하면 무조건 보수로 통용되던 시대에 변화가 깃들기 시작한 것일까. 이들이 이념 갈등과 충돌을 막아줄 사상의 완충지대 역할을 해 줄까. 혹은 새로운 이념 갈등의 진원지가 될 것인가. 논점은 이렇게 다양하다.

강남좌파는 보수 진영이 운동권 출신 486세대 그러니까 40대면서, 80년대 학번이고, 60년대생인 진보 인사들을 꼬집어 쓰던 용어다. 정치적ㆍ이념적으론 좌파지만 행동은 '강남 주민스럽다'는, 일견 부정적 뉘앙스를 풍기는 말이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2006년 5월 <인물과 사상>이라는 월간지에서 강남좌파를 "생각은 좌파적이지만 생활 수준은 강남 사람 못지않은 이들"이라고 정의했다. 쉽게 이야기해 과거에 좌파하면 거리의 투사로 인식됐는데 이제는 문화와 멋을 아는 진보세력을 지칭한다.

그렇다. 지난해 지방선거 직전 공개된 노회찬 당시 서울시장 후보의 첼로 연주 사진은 강남좌파 이미지를 대중에 인식시키는데 일조했다. 노회찬 후보는 이 사진을 표지에 담으면서 "모든 국민이 악기 하나쯤은 연주할 수 있는 나라"가 자신의 꿈 가운데 하나라고 밝혔다. 한편 '강남 좌파'의 상징격으로 떠오른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언론 칼럼에서 "아무리 가난한 집안에 태어났어도 소질만 있다면 아마추어 첼리스트가 될 수 있는 사회는 한낱 꿈이 아니어야 한다"고 설파했다.

강남은 풍요의 땅이면서 특혜의 입지로 통한다. 그렇다. 유신정권 말기인 1975년부터 1980년까지 서울 땅값은 5년 새 여섯 배가 올랐다. 5공화국 시절 수립된 신도시 공급 계획은 강남의 거품을 온 나라로 확산시켰다. 1987년 대선 당시 정부 여당이 뿌린 엄청난 자금도 곧바로 부동산 시장으로 직행했다. 강남이 개발과 성장과 보수와 독점과 독재와 시장주의로 상징되는 한국 보수의 가치를 대변하게 된 건 그때부터였다. 전두환 노태우 두 대통령은 강남에 보수의 터를 닦았다. 그리고 강남은 영남에 이어 보수특구가 돼 버렸다.

이런 땅에서 좌파가 움트다니 놀라운 일 아닌가. 조국 교수는 강남좌파 현상을 이렇게 풀이한다. "부유층의 진보 영토가 넓어지는 현상은 보수 정치권이 부유층의 눈높이를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능력없는 보수 정치에 실망하고 특정 계층만 대변하는 현 정부에 낙담한 식견 높은 젊은 부유층이 극심한 사회 양극화에 대한 일종의 계급적 자책을 느끼며 점차 진보적 색채를 강하게 띠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의미로 봐야 할까. 강남 좌파는 소비의 욕망을 즐기면서도 소비의 쾌락은 경멸한다는 설명이다. 투자자의 영악함은 지녔는데 투자자의 탐욕을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해석도 있다. 물신의 노예지만 물신을 숭배하지는 않는다는 정서에도 주목한다. 물론 강남 속 서민이 강남 좌파의 실체라는 주장도 있다. 국민의정부와 참여정부가 강남 아파트 재개발을 꽁꽁 묶어버린 탓에 강남에는 틈새 원룸과 빌라만 늘어났다. 여기로 강남 이민자들이 흘러들어 새로운 여론층을 형성하게 됐다는 주장이다.

진보주의 전통이 깊은 서구에서는 오래 전부터 부유한 진보주의자들을 일컫는 다채로운 용어들이 사용돼 왔다. "우리가 따뜻한 응접실에서 샴페인 잔을 부딪히며 사회주의에 관한 잡담을 할 때, 바깥에서 추위와 배고픔에 죽어가는 건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쓴 19세기 러시아 철학자 알렉산드르 게르첸의 글에서 유래한 '샴페인 사회주의자'라는 말도 많이 쓰인다. '살롱 좌파'라는 말도 유사어이다. 미국에서는 부자 좌파를 '리무진 리버럴'이라고 부른다. 프랑스에서는 철갑상어알을 먹으며 사회주의를 논한다는 의미로 부자 좌파들을 '고슈 카비아' 즉 캐비어좌파라고 부른다. 대체로 비꼬는 투이다.

강남 좌파, 이들이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결집력을 보이고 있는지 궁금하다. 강남 지역에서 진보 정당에 대한 지지율이 꾸준한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일례로 서울 강남을 지역구의 경우, 2007년 대선 당시 권영길 민주노동당 후보 득표율은 1.3%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듬해 18대 총선에서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후보의 득표율이 10.1%로 자유선진당 후보 득표율 7.4%를 앞질렀다. 점증추세의 강남 좌파, 아직은 진보정당 간판으로 강남은 물론 서울에서 국회의원 당선자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내년에는 성공 또는 의미있는 실적을 나타낼 수 있을까?

그런데 이들이 진정한 진보세력으로 자리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평가도 있다. 정치평론가 공희준 씨 역시 2005년부터 강남좌파 현상에 주목했다. '별이 연상되는 유명 커피전문점에서 체게바라 평전을 읽는 사람'이라고 상징화했다. 그러면서 이들이 ‘보수’보다 더 혐오하는 것이 ‘촌스러움’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게 싫어서일까. '88만 원 세대'의 저자인 우석훈 박사는, 자신에 대해 '강남 좌파'로 부르는 이들이 나오자, 이삿짐을 싸고 강북으로 이사했다. 한편 한국일보가 강남에 사는 진보 성향의 유권자 109명을 2월 11일에 조사했는데, 무상급식ㆍ무상의료 같은 보편적 복지 제도 도입에 대해서도 40~50대의 부정적인 비율이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결국 세금으로 충당될 일이고, 그렇다면 부유층이 져야 할 세 부담이 커지게 되니 이에 반대한다고 봐야할까.

결국 강남에 사는 이들이 이념적으로 분화한다고 보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기존 보수가 취하는 탐욕적 처세에 대해 진보 성향의 젊은 거주자들의 반기를 든 것이라고 봐야 한다. 그래서 강남좌파 현상이 일시적인 것인지 아니면 사회적 약자에 대한 깊은 공감을 형성하며 자기 희생의 의지를 담보하고 있는지는 좀 더 두고 볼 일이라는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