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권으로서의 주거권

우리 사회에서 집의 문제는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경제적 괴리를 넘어서 개인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짓는 요인이 되고 있으며 주거불평등과 주거 격차의 양극화를 재생산할 뿐 아니라 귀착시킨다. 이제 집은 생활의 공간이 아니라 자본을 위한 공간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집을 더 이상 주거의 확보와 이용이라는 측면이 아니라 소유의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집의 본질적 가치는 소유의 의미보다는 존재의 의미에 있다. 땅과 마찬가지로 집의 경제적 가치와 효용은 자본으로 평가될 수 없다. 집은 소유의 공간이 아니라 존재의 공간이며 삶의 공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주거권은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이라는 의미에서 생존권의 성격을 가지며 결코 침해될 수 없는 인간의 보편적 권리이다.

우리는 주거권의 실현을 세 가지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다. 하나는 주택공급을 확대하는 방법이며, 다음으로 현재의 주거생활을 보장하는 방법이고, 마지막은 주거환경을 개선하는 방법이다. 첫째 방법은 자본주의 사회구조에서는 현실화하기 어렵지만 두 번째 방법은 주거권을 인정하는 정부의 정책과 입법화를 통하여 실현해 나갈 수 있다. 그리고 주거 환경 개선을 위해서는 문화적, 환경친화적 관점에서 아파트 중심의 주거형태로 획일화되는 주택정책을 다변화 할 수 있다.

우리 시대의 인권은 크게 소극적 권리인 시민적, 정치적 권리와 적극적 권리인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로 나누어지는데 주거권은 후자에 속한다. 주거권 논의는 1948년의 ‘세계인권 선언’에서 유래하였으며 1978년 ‘UN 인간 정주프로그램’(UN HABITAT)을 통하여 구체화되었고, 1996년 이스탄불 ‘UN 2차 정주회의’(HABITAT II)와 2002년 ‘UN 주거권 프로그램’(UNHRP)을 통하여 발전해왔다.

주목할 만한 것은 1970년대 초부터 제 3세대 인권에 관한 논의가 UN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가운데 적합한 환경 속에 살 권리와 평화롭게 살 권리가 강조되면서 주거권문제가 중심적으로 다루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20세기까지는 주거권이 인권의 일부로 정착되어갔다면, 21세기는 주거권의 내용들이 사회적 움직임으로서 실현되어 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인권으로서의 주거권이 아직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으며 정부의 정책적, 제도적 노력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재개발 정책과 토지공개념 정책은 가진 자를 향해 있으며 빈곤계층과 소외 계층을 향한 대책은 강구되지 않고 있다. 주민들의 분산과 지역교회의 해체는 가속화되고 있다. 개발의 이익은 공평하게 분배되지 못하고 기업과 자본가에게 독점되고 있다. 규제중심의 토지정책은 재벌들의 토지독점을 합법화하고 임차인과 무주택 서민의 부담만 가중시키고 있다.

다만 2005년 이후 국가 인권위원회가 국제적 상황과 국내적 사건들을 접하면서 주거권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는 것에서 긍정적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2. 주거권의 성서적 기초

구약성서와 이스라엘 역사에서 땅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창조와 타락이야기, 출애굽과 가나안 정착, 왕정체제와 포로생활은 땅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땅에서 쫓겨나고 동생을 죽인 가인은 땅을 잃고 유리하는 자가 된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으로 가지 않고 이집트로 향했던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은 노예가 되었으나 출애굽을 통해서 가나안 땅을 축복으로 받는다. 노예로서 살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이란 그들의 자유를 상징한다. 그 땅의 분배에는 계급과 빈부의 차이가 전제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이다. 그것은 공동체적 재산이며 사유화된 것이 아니다. 이후 왕정체제가 확립되자 정치권력을 통한 계급화가 고착되고 땅이 사유화되기 시작하였으며 그 결과로서 부가 편중되어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평등한 유일 신앙 공동체가 와해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공동체적 위기상황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에게 땅을 빼앗기고 포로로 잡혀가게 된다. 땅을 잃어버리고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던 백성들이 땅을 다시 회복한다는 것은 선민으로서의 그들의 정체성이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 속에서 땅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과 심판의 매개체가 된다.

구약성서에서 땅은 지리적, 정치적 차원을 넘어서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계약관계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 구원해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의 계약을 통해 자신과 이스라엘의 계약관계를 예시하시고,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서, 그리고 노아와 다윗을 통해서 그 관계를 재확인하신다.

계약사상이 구약성서의 중심을 형성한다고 볼 때 토지개념은 그 계약사상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상징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계약관계를 구체적으로 명시한 것이 ‘계명’, 곧 율법인데 사회적 율법인 ‘희년법’은 땅과 주거지에 관한 내용을 명시하고 있다. ‘희년법’은 ‘안식년법’의 내용을 더욱 강화시킨 것인데 7년을 주기로 돌아오는 안식년 법과는 달리 50년을 주기로 지켜졌다. 희년법이 반복하여 강조하는 내용은 토지 소유권의 문제다. 그것에 따르면 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인간은 그 땅을 맡은 청지기일 뿐이다. 따라서 토지소유권 주장이나 주거권에 대한 침해는 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침해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희년법은 그럼으로써 토지소유의 무한한 확장을 막고 잃었던 집을 찾아줌으로써 정치적 계급화와 통한 경제적 양극화를 견제하는 제도적 장치였다. 희년이 되면 땅에서 쫓겨났던 사람은 땅을 다시 찾고, 집을 팔았던 사람도 집을 다시 돌려받게 된다. 그 당시 땅과 집을 잃은 사람은 노예로 전락해 버렸으며, 그것은 모두가 평등한 유일신앙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또한 집은 생존의 마지막 보루였으며 가족공동체의 구심점이었다. 하나님은 토지 매매 금지와 함께 집을 팔지 말라고 명령하심으로써 가족의 와해를 막으시고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최소한의 기초적 삶을 보장하셨다. 율법으로 보장된 토지에 거주하며 토지를 이용하여 생존할 권리는 인권의 문제를 넘어서 이스라엘 민족이 역사적 수난과 이방종교의 영향 가운데서도 유일신앙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었던 구심점이었다.

3. 주거권의 경제적 차원

경제학은 인간의 삶을 영위하는 것에 관한 학문이라는 의미에서 윤리학과 그 맥을 같이 한다. 경제는 사회, 정치, 문화처럼 하나의 특징적인 질서를 형성하며 그 질서를 이끌어 가는 내재적 원리를 가지고 있다. 경제질서는 인간 활동의 산물이며 시장과 자본은 인간 삶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러므로 인간을 '경제적 동물'(homo economicus)이라 할 때 우리는 인간론을 경제이론을 통해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를 인간 실존의 영역에서 이해해야 한다. 경제질서와 그 내재적 규범성은 인간의 경제적 삶을 규정하고 유지키시는 구조일 뿐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형성시키는 구조이다. 경제질서는 인간과 대립해 있는 외부적인 구조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이며 그의 삶이다. 경제의 위기는 곧 인간의 위기다. 모든 질서는 상호의존적이며 인간의 삶과 연대적이다. 그러므로 경제의 문제는 단지 경기침체, 외환위기가 아니라 역사구조 전체의 문제이며 궁극적으로는 인간 삶의 문제이다. 주거권의 침해는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의 위기이며 그런 의미에서 경제질서 전체의 위기이다.

인간 실존이 경제질서에 의해 규정될 뿐 아니라 인간이 그 질서를 형성한다는 의미에서 경제문제는 두 가지 방향에서 다루어질 수 있다. 하나는 경제구조의 변화가 인간 삶의 변화를 가져온다는 입장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 삶의 변화가 경제구조의 변화를 일으킨다는 입장이다. 전자는 경제학, 정치학의 과제이고, 후자는 기독교 윤리학의 과제이다. 경제질서가 잘못된 목적을 향해서 나아갈 때, 다시 말해서 그것이 인간의 삶을 위해 기여하지 않고 자본의 권력을 위해 이용될 때, 그리고 인간이 경제적 효용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때 그 질서는 무너진다.

우리는 신자유주의 경제질서 안에서 심화되고 있는 주거권 침해의 문제 속에서 16세기 이후 산업혁명기에 일어났던 ‘인클로져 운동’(enclosure movement)을 통한 경제적 인간의 위기를 발견할 수 있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전개되면서 모직공업이 활발해지자 귀족과 영주 등의 토지소유자들은 자본 축적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농지를 목초지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농경지와 공유지, 그리고 황무지까지 목양을 위해서 울타리가 쳐지고 농민들은 거주지에서 쫓겨나 대거 도시로 몰려들었다. 자본과 기술이 없던 그들은 노동력을 파는 일용직 노동자로 전락하고 도시빈민을 형성하였으며 프로레타리아의 선조가 되었다. 개발을 통한 주거권 침해는 신자유주의적 인클로져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정부 주도의 도시 구획화(enclosure)에 의해서 주민들은 쫓겨나고 새로운 도시 빈민층을 형성해 가고 있다.

4. 나가는 말

인권은 그것을 규정하는 방식에 있어서 실정적 권리와 도덕적 권리로 나누어진다. 실정적 권리는 법으로 규정된 인권을 말하지만 도덕적 권리는 인간의 존엄성에 기초한 자연법적 전통에 기초한다. 주거권은 실정적 권리를 넘어서는 도덕적 권리에 속한다. 도덕법(moral law)이 시민법(civil law)보다 상위개념이듯이 도덕적 권리로서 주거권은 관련 법규들에 의해서 규정될 수 없는 상위개념이다. 따라서 토지와 주택에 관련된 법규들이 주거권을 포괄하거나 제한할 수 없다.
주거권을 보장하는 주거기본법의 제정을 위한 노력도 필요하지만 윤리적 차원에서 주거권 문제에 대한 사회적 의식의 전환도 병행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에 주거권 침해의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보다 더 심각한 위기는 사회구성원들과 정부가 그것에 무감각해 있다는 것이다. 무감각은 죽음의 증상이다. 무감각한 사회는 죽은 사회이다. 우리가 이웃에 고통에 대하여 무감각하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정신적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우리 모두는 어딘가에 삶의 공간을 형성하고 있는 거주자다. 거주권은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보편적 인권이다.

/ 5월 12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도시재개발 지역과 교회 문제 대책위원회 주최 ‘도시재개발에 따른 지역과 교회문제’ 간담회 발제문 중

/ 협성대학교 기독윤리 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