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정주련가?

평양을 떠나 평야를 가로질러 북으로 달린다. 지나치는 역마다 이름도 새롭도다. 순안，숙천，협흥리，신안주를 지나 드디어 살수 대첩으로 유명한 청천강을 건너간다. 다시 힘찬 기적을 울리며서 달리는 열차의 차창으로 멀리 묘향산맥의 준령이 보이는 듯 마는 듯 싶다. 드넓은 들은 지난면서 만나는 역들, 영미동，운전동，광동동，마침내 열차는 정주 역에 들어 서고，여기가 정주련가? 허겁지겁 우리 일행은 프랫트 홈에 뛰어 내린다. 그리도 오고 싶었던 땅.

역사(驛舍)를 빠져 나오자，광장 게시판 지도에서 오산을 찾는다. 저기가 제석산(帝釋山)인가? 저기가 호수인가? 그렇다면 저 기슭이 오산학교 터가 아닐까? 우리는 모교라도 찾듯이 걸음발을 재촉한다. 거기에 위대한 혼들이 숨 쉬고 있었다. 남강 이승훈，고당 조만식，춘원 이광수，유영모 등 위대한 이들이 이 학교에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솔직 담백하고 시원시원하기만 하던 남강, 그는 남아 중에 남아였다. 옳다 여기면 행동이 앞섰다. 걸음도 빨랐고 자세도 발랐다.

그의 가슴은 뜨거웠고 그의 피는 희생적이었다. 하루는 학교를 수리하던 사람이 기와가 모자란다고 하자 ‘내 집 기와를 벗겨 써라’고 할 정도였고, 학교 운영이 어려워 선생님들의 생계가 어렵게 되자 부인에게 말하기를 ‘남은 세간을 팔아 학교에 보태고 우리는 학교 곁에 가서 학생들 밥이나 해주면 되지 않소.’라고 권유하던 남강이었다. 그러한 눈물과 뜨거운 가슴의 교훈은 학생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평북 정주 오산학교 전경)

오늘 다시 뵙는다면…….
우리는 오산의 터 위에서 뜨거워진다. 어찌 오늘은 이런 교장, 이런 스승을 뵙기가 이리 어려운가? 감옥에서나 어디서나 솔선수범하던 스승의 모습에서나 3․1운동 선언서 밑에 기록할 서명란의 순서 때문에 옥신각신할 때 ‘순서는 무슨 순서야，이거 죽는 순서야, 죽는 순서. 아무나 먼저 쓰면 어때. 손병희를 먼저 써’라고 기걸 차게 외치던 저 벌판같이 넓던 가슴.

모든 것을 하나님과 나라 위해 바치고는 그래도 아쉬웠던가? 죽는 날에 유언이라는 게 너무 하구나. ‘이제 내가 나라를 위하는 것도 마지막이니 죽거든 뼈를 흙 속에 묻지 말고 생리학 표본을 만들어서 학생들이 연구하느데 쓰게 하여라.’ 그런 스승의 모습을 생각하면 그저 우리는 더럽고 추한 모습일 뿐이다. 어찌 오산은 그 만의 공이랴. 거기 고당 조만식이 있으므로 오산은 웅대한 느낌을 가지게 한다.

남강의 솔직 담백과 열정으로 학생들 속에 뜨거운 인간애와 솔직함의 뼈를 이루어 놓았다면 조만식의 저 크고 넓은 대지의 마음 때문에 학생들은 그 마음에 대지를 품은 것이다. 세계 속에 조국을 보았고 역사 속에 사명을 보았던 것이다. 남강은 실수도 많았으나 솔직함 때문에 감화를 주었고 고당은 실수 없는 성실성으로 폭발성은 없으나 변함없는 본이 감화를 주었다. 또한 남강은 진보적인 반면 고당은 보수적 이었기에 그 제자들은 충분한 사상의 자양분을 섭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만식은 32세 때부터 오산학교 교장으로 와서 44세까지 오산에서 지냈다. 그는 정강이에 올라가는 수목 두루마기를 입고 까까머리에 말총 모자를 썼다. 그는 학생들과 기숙사에서 함께 침식하면서 교장 겸 교사 겸 사감，사환 노릇까지 했다. 그 밑에서 주기철，한경직, 함석헌，백인제，주기용，홍종인，김홍일이 배출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예언자를 겸한 교육자는 언제나 제자들에게 경건한 신앙과 높은 이상과 민족을 위하여 바치는 헌신의 감정을 불어 넣었다.

스승의 고매한 모습과 맑은 목소리는 제자들을 게으른 잠에서 깨워 일으켜 그들의 혈관 속에 새로운 피를 불어 넣어 주었다. 오산은 남강의 열정과 고당의 진실이 조화를 이루었기에 그 위대가 들어난 것이다. 거기에다가 춘원 이광수의 공로를 첨가해야 할 것이다. 오산학교에 눈물의 시인 춘원이 있었다는데 우리의 감동은 크다. 춘원은 한일합방이 되던 해에 열아홉 살의 어린 나이로 동경에서 명치 학원을 마치고 교사로 부임하였다.

그 춘원에게서 소월 같은 시인이 나왔다. 춘원은 남강이 감옥에 있을 때 교장서리로 있으면서 성경도 가르치고 교회에서 설교도 했었다. 그러나 춘원이 품고 있는 문학적인 낭만성이 그의 절제를 약화시키게 했다. 낭만주의의 영향 탓에 그는 남녀의 애정에 대해 너무 자유적 이었다. 보수성이 없었다. 만약 춘원이 그런 사상에 영향을 받지 않았더라도, 아니 충분히 소화만 했더라도 오산은 그를 더 크고 위대하게 만들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오산학교는 낭만주의의 영향을 주는 춘원을 감당할 수가 없게 되었다. 학교 측은 그를 권고사직 시키었다. 춘원은 너무나 정들였던 오산을 떠나기에 너무 아쉬웠다. 그는 학교를 떠나 60-70리 길을 가다가 밤에 다시 돌아와 기숙사 방마다 지나며 어둠 속에 신발을 바로 놓아주며 기도했고 이튿날 송별연에서는 울음바다가 되었을 정도라고 전해지고 있다. 우리는 민족정신의 고향 정주를 떠난다.

동방의 예루살렘이라던 선천

정주에서 곽산을 지나니 곧이어 선천이 나타난다. 정주와 함께 평북 서해안에 연해있는 선천은 강남산맥 꼬리에 솟은 대륙산(大陸山) 밑에 위치하고 있다. 기독교와 신교육의 보급이 정주보다 앞섰으며 따라서 이 지방민들은 ‘선천이 항일투쟁의 발원지였다.’는 것을 자부하던 도시였다. 선천의 기독교 보급은 동방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릴 만큼 성했다. 일요일이면 상인들이 모두 철시를 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군민들 전체가 기독교 신자라고는 할 수가 없으나 신도가 많아 장사가 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 지방에 기독교가 활기를 띠었던 것만큼 신교육 운동도 일찍 시작되었다. 정주의 오산학교 보다 2년 먼저 이곳에는 미국 선교회가 주축이 되어 ‘신성학교’가 창설되었다. 이어 여학교로 ‘보성학교’가 설립되어 민족운동의 선도적 역할을 해왔다.

요단 고우푸스는 말하기를 “1907년 내가 방문한 또 하나의 지방은 평양 북부 철도 연변에 있는 선천입니다. 선교사가 배치된 지 겨우 8년밖에 안 되는 아직 어린 기독교 도시니만치 신도가 많을 것으로 기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실지로 우리가 그곳에 찾아갔을 때，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무려 15.348 명이나 되는 신도가 선천읍 일대에 살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신도란 말은 교회에 출석하며 현금을 바치는 사람을 말합니다. 1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교회가 바로 완공을 본 때 였습니다. 1년 전에는 800명 수용의 교회였는데 신도수는 870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증축할 수밖에는 없었습니다.”라 했다.

평양은 성령의 능력의 보급소라면 선천은 성령의 원천이었고，서울이 민족운동의 보급소라면 정주는 민족운동의 원천이요, 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