띠 띠고 살다가
- 비보를 들은 날 밤

꿈꾸는 교회
박수진 목사와 부목사들이
필리핀에 선교지 방문으로 갔다가
어제 빗길 교통사고로 갔습니다.
밤새 시달렸습니다.
뭔가에 밤새 시달렸습니다.

산다는 것,
아니 살아 있다는 것,
그게 뭡니까?
한 치 앞을 내다보지도 못하고 ...
그것도 선한 일을 하다가
그냥 갑니다.

가족들이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그 가족들이 얼마나 황망할까요
특별히 그 집 딸이 생각났습니다.
하영이 선배로 오르겐을 전공한
그 집 딸이 생각나며
마음이, 마음이 무척 아파옵니다.

하나님께서 데려가신 것이지만
그래도 좀 아쉽습니다.
좀 아픕니다.
좀 이상합니다.
언제라도 갈 수 있다는 것
모른 바는 아님에도 말입니다.

내가 보장받은 것이 뭡니까?
이 땅에서 내가 보장 받은 게 뭡니까?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없군요.
내 것이다, 내 맘대로다 하는 것이
실상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땅에선 나는 철저하게 방문자, 순례자일 뿐.

내게 주어진 것,
내게 보장된 것은
오직 하늘나라 시민권,
아, 그렇습니다.
그러니 때로는 불시에 가는 것도
괜찮은 거군요.

가족들에겐 미안하고
교우들에겐 서운함을 주겠지만
내게 보장된 하늘나라 시민,
그것을 누리는 일이
바로 죽음이기에
불시에 가는 것도 괜찮은 거군요.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아파하고 서운해 하는 것은
전적으로 이곳에 남겨진 자로서
느끼는 비애와 서글픔이군요.
그렇다면 저 편에서 내가 산다면
죽음은 내게 또 다른 축복입니다.

그렇다고 그냥 죽을까요?
아니지요.
하나님께서 내게 명(命)하신 생명(生命)인데
그 명을 내 마음대로 줄일 수 있겠습니까
그것보다 내게 명(命)하신 사명(使命)이 있는데
그건 제대로 하고 가야지 남기고 갈 수는 없겠지요.

이렇게 생각해보니
죽음은 축복인데
저렇게 생각해 보면
아, 죽음은 그래도 서글픔입니다.
이곳에 함께 뒹굴던 이들과 헤어진다는,
그것도 어떤 이는 영원히 ...

그러나 분명한 것,
언제라도 부르실 때
갈 준비를 하고 살아야겠다는 것.
그 때를 모르니
명하신 것 제대로 하다가,
그야말로 띠 띠고 살다가 떠나리다.

/왕십리중앙교회 담임목사